야구장의 응원전

by 쵸코 아빠

민주주의는 응원전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이웃이 어떤 삶을 함께 만들어갈지 묻는, 가장 깊은 질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영 간의 대립은 점점 첨예해지고 있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세상을 둘로 갈라놓는 말들이 우리의 대화와 시선을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가 젊은 시절에 마주했던 정치의 풍경은 조금 달랐다. 그때의 정치적 행위는 좌우의 대립이 아니라, 부정한 독재 권력에 맞선 시민의 저항이었다.

그것은 권력을 탐하는 투쟁이 아니라 더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는 몸부림이었다. 청년들이 가장 앞에 섰고, 그 청년들은 독재 권력에 의해 ‘빨갱이’, ‘체제를 위협하는 자’로 불렸다.


오늘날의 정치 현실은 많이 변했다. 이제 정치적 대립은 마치 프로야구 경기의 응원전처럼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팀, 내가 속한 연고지를 응원하듯, 특정 정치 세력을 무조건 지지한다. 그러나, 정치는 단순한 응원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과 이웃의 삶을 바꾸는 선택이다.


플라톤은 그의 대표적 저서 《국가》에서 중우정치를 비판했다. 무지한 군중이 민주주의 체제를 망치고 무제한의 자유로 인해 욕심과 무질서를 야기한다고 보았다. 정치를 진영의 응원전으로 전락시키는 순간, 우리는 사실상 민주주의 실패인 중우정치로 빠진 것과 다름없다. 독일 나치의 사례가 그 위험을 극명하게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현실은 그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싶다.


특히 ‘보수’라는 진영은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고,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며, 안정을 내세운다. 하지만 지금의 보수는 본래의 가치와는 다른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다. 기득권이 독점하는 체계 속에서 유지되는 ‘안정’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 질서를 지키는 일이 과연 다수 시민의 삶을 지켜주는가.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이들을 떠올려 보자.

그곳의 다수는 노인들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어두운 시기를 지나며 경제적으로 소외된 세대가, 주류층의 질서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분단과 전쟁의 기억 속에서 ‘보수=애국, 진보=위협’이라는 단순한 구도가 각인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기업을 우선시하며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논리에 동의하는 저소득층 노인의 선택은 과연 자기 자신과 자녀를 위한 것일까? 세금을 줄이고 복지를 줄이는 것이 후손을 위한 길일까? 아니면 기득권의 부담을 덜어주고, 부의 세습을 강화하는 길일까?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이렇게 썼다.


“정치적 질서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붙드는 ‘질서’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소수를 위한 성채인가, 다수를 위한 울타리인가.


청년들은 종종 말한다. 복지 정책은 미래 세대가 떠안을 빚이라고. 하지만 그 빚을 과연 누가 지게 될까. 평범한 청년들일까, 아니면 이미 많은 것을 상속받은 기득권층의 자녀들일까.


조선시대 대동법도 당시 지주와 관료들은 “백성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그 반대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 몫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오늘날의 보수 논리와 다르지 않다.


밀은 《자유론》에서 말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결이 아니라, 각 개인이 공동체의 이익을 깊이 고려한 선택이다.”


정치적 선택은 편 가르기의 승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강물이 어디로 흘러갈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정치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내 식탁 위의 밥그릇, 내 아이가 앉아 있는 교실, 내가 늙어 맞이할 노년의 풍경 속에 있다.


정치적 선택은 곧 나를 위한 선택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고, 우리가 후손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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