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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Nov 11. 2023

아이의 질문은 항상 무척이나 본질적이다.

상사의 질문보다 더 무서운 아이의 질문, '이게 최선입니까?'

재택근무를 할 때였다. 보고서 초안이 잘 써지지가 않아 끙끙대고 있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벌써 다 맞춰가는 레고를 손에 들고 해맑게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난 새삼 레고를 다 맞추어가는 아이가 부러웠다.


"벌써 다 맞춘거야? 정말 부럽다. 엄마는 글짓기가 어려워서 고민하고 있어." 부러워 하는 나를 보고 아이는 의기 양양한 얼굴로 묻는다.


"엄마는 무슨 문제를 푸는데요?"


"엄마는 엄마가 찾은 문제를 풀고있어. 그런데 이 문제가 풀기 어렵네."


"그래요? 음.. 그럼 더 쉬운 문제를 찾아보세요."

 

"그러면 좋은데, 이미 이 문제를 푼다고 했고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마무리를 어떻게든 해야해."


"더 쉬운 문제를 찾았으면 좋았을텐데. 왜 찾지 않았어요?"


왜 더 쉬운 다른 문제를 찾지 않았냐는 아이의 질문에 나의 말문은 막혀 버렸다. 그렇게 왜 난 이 주제를 하겠다고 했을까. 또 다른 주제를 더 찾아보지 않았을까..


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엄마가 답을 하지 못하자, 아이는 답변을 듣기 어렵겠다 싶었는지 자신의 마지막 레고 조각을 맞추러 돌아갔다.


"이게 최선입니까?" 라는 상사의 질문과도 같은 "왜 더 찾아 보지 않았어요?"라는 아이의 말에 머리가 멍했다.


나의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지만, 그 최선이 최선이 아니라는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나, 다른 차원의 접근이나, 더 많은 데이터 수집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질문과 답으로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기에 말이다.


아이의 이런 본질에 가까운 질문들을 마주할 때면, 어른은 오히려 본질을 마주할 용기가 부족해서 스스로 묻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아이라서 할 수 있는 이 배려없는 질문이 사실은 필요한 질문이다. 스스로 변명을 하게 되더라도, 이게 정말 최선인지, 거침없이 해맑게 물어보는 그런 투명하지만 너무나도 날카로운 본질적인 질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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