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속 칼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by avivaya

다음은 2026년 1월 7일에 실린 한겨레 신문 ’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에서 발췌한 글이다.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인권과 관용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신자유주의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 그의 ‘도저히’라는 단어에서 벌써 속울음이 차올랐다. ‘도저히‘는 사전적 의미로 : 아무리 하여도 :라는 부사어이다. 갖은 노력을 기울여본들 허사라는 소리다. 지금처럼 살기까지도 뜨거운 눈물을 삼켜가면서 바등바등 살아왔는데 앞으로 살아갈 삶은 싹도 나기 전에 잘려 나간 것이다. 내가 뿌린 씨는 어둠 속에만 존재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햇빛을 볼 기회조차 없을 테니 땅 위로 올라올 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막연한 희망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능력으로는 그 나물에 그 밥이 최선이 될 것이라는 비참한 미래를 나에게 예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저히‘라는 부사어를 지우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최소한 지금과 똑같이는 안 될 것은 분명하다. 미래에는 새 능력이 필요하다. 지금껏 버텨온 나와는 다른 캐릭터 말이다. 막막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다시 박노자 교수님께서 쓰신 문장으로 돌아가보면 ‘인권과 관용‘에서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표현이 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인권‘과 ’ 관용’은 기본적으로 지킬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과 관용(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은 컴퓨터 바탕 화면처럼 늘 나 자신을 바라보고 점검할 수 있는 삶으로 해석된다. 나는 인권과 관용을 나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에게 단단한 삶의 주춧돌로 작용할 수 있도록 활성화하는 것 또한 나의 몫이다. 미래에는 나 자신을 직접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 같다. 그 뒤 한 가지 더 중요한 대목이 남아 있다.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여기에서 나는 매일 매 순간 찾아오는 어둠에 대해 ‘극복‘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 어둠‘은 반복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번 똑같지 않고 다른 답이 요구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융통성 있는 사고력을 갖추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제외시켜 놨던 것들에 대해 재고해 봐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하게 내 삶을 살아가면 된다. 답이 간단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처음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내가 원하는 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될지 꽤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가보고 싶다. ‘도저히‘ 안 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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