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언어들
세탁기 탈수 소리가 막 멈춰 선다.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넌다. 화창한 가을날 우울한 마음을 햇빛에 말리기라도 하듯 빨래를 넌다.
설거지에 청소까지 몇 시간째 집안일을 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직장 관계로 일주일간 밀린 집안일을 한다고 발바닥에 불이 난다. 집안일에 서툰 사람이라 정리를 꼼꼼히 한다고 해도 뭔가 모르게 엉성하다. 대충 정리가 되면 좋아하는 봉지 커피를 한잔 마신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돌려가며 ‘마션’ 영화를 본다. 왠지 모를 엔도르핀이 솟는다. 화성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와트니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헤쳐 나갈 것만 같다. 커피 한잔의 온기가 서서히 사라질 즈음 금방 폈다 지는 들꽃처럼 풀이 죽는다.
휴대폰을 뒤적인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요일 오후. 왠지 모를 그리움을 부른다. 누군가가 전화해 안부라도 물어주기를 기대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전화가 올 턱이 없다. 마음이 울적해진다.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야겠다.
집을 나선다. 책을 한 권 들고 화장기 없는 운동복 차림으로 산책길에 올랐다. 수성 못을 갈까 새로 조성된 신천 길을 걸을까 망설이다가 신천 길로 방향을 틀었다. 수성 못은 신천보다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젊은 연인들과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나른한 일요일 오후의 허전함을 더 담아낼지도 모른다. 차라리 소란스럽지 않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은 신천 길이 눈에 띄지 않고 혼자서 걷다 놀다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줄어든 신천 강물에 몇 마리의 오리 무리들이 먹이를 찾고 있다. 물속으로 부리를 넣고 먹이를 탐내는 모습은 강물처럼 평화롭다. 둘, 셋 무리를 지어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느릿느릿 물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운동기구에 몸을 맡긴다. 스트레칭을 몇 번 하다가 흥미를 잃는다. 덩굴나무 그늘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책 속의 주인공들이 뜨거운 사랑을 속삭인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책 속에 빠져들고 있을 때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중년의 남자가 자전거를 세우며 옆에 앉는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날씨가 참 좋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나쁜 짓을 하며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책장을 덮고 구릿빛을 한 그 남자를 쳐다본다. 책 표지를 보여주며 오늘 아침 방송에서 베스트셀러라고 소개한 책을 이 남자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근육질이 드러나는 몸에 딱 붙는 사이클 옷을 입은 남자는 목젖을 드러내며 물을 마신다. 심장이 미세하게 두근거린다.
‘화장이나 하고 나올걸.’
몇 마디 건네더니 남자는 잠시 쉬었는지 일어서서 자전거를 타고 가 버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쳐다본다.
‘그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전화번호를 물어볼 리가 없지.’
자전거를 따라잡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우며 나도 바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