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언어들
봄이 되자 꽃을 보아야 하는데 왠지 바다가 그리웠다. 바다에서 꽃을 보기라도 하려는 걸까. 때마침 파도에 구르는 자갈들이 소리를 낸다. 자그락자그락 그리움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봄비에 숨은 해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비에 가린 태양이 하늘 저 높이 바다 저 멀리 크기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한다는 ‘영일만’은 해를 맞이하듯 매일 아침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아침마다 새로 시작하고 싶은 소망이 해를 맞이하는 바다 영일만으로 이끈 것이다.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을 보고 영일만 바다를 낀 둘레길을 걷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연인 한 쌍이 슈룹 꽃을 피우고 지나간다. 바다 위를 걷는 한 송이 사랑꽃이다. 안개가 살포시 그 뒤를 쫓고 있다. 임금을 지키는 무사처럼 그림자만 드리운 채 그들을 호위하고 있다.
나는 안개와 비속에 몸을 담근 채 또 다른 연인 한 쌍을 떠 올린다. 고대 신라의 연오랑세오녀다. 바위 위에 신발만 덩그러니 벗어 놓은 채 바다로 사라져 버린 남편을 기다리는 세오녀의 굽은 눈물을 상상한다. 얼마나 연오랑이 그리웠을까. 바위도 그 슬픔의 크기를 가늠했는가. 무거운 바위에 노를 달아 그녀를 일본으로 데려간다. 일본의 어느 궁궐에서 마침내 연오랑과 세오녀는 재회를 한다. 왕과 왕비가 되어 일본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신라를 떠났을 때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한다. 설화란 원래 신비로운 것이지만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그만큼 부부의 사랑이 애절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해와 달의 크기만큼 슬픔이 깊었을 것이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보다.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 바위가 배가 되어 노를 젓는 것. 그 보다 더한 지독한 사랑을 또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세오녀가 짠 베를 제단에 올려 제사를 지내자 마침내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 있는 귀비고의 스토리텔링은 설화와 역사 사이를 오간다.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신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일본 이즈모에서는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와 비슷한 신화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를 실존 인물이 아닐까 추정한다. 신라인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도시에서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섬나라 일본과 신라가 고대부터 연결되어 백제 이전부터 일본에 문물을 전파하고 교류하였음을 시사한다.
일본을 향한 사랑을 생각하면 나는 몇 해 전 늦은 나이에 결혼한 지인을 떠올린다. 지인은 독신으로 지내다가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독신으로 지낸 이유가 무엇이냐며 농담 삼아 물었었는데 그녀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고 했다. 남자는 공부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모른 채 세월만 흘렀는데 어느덧 지금의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여러 해 동안 가슴 한 귀퉁이에 막연한 촛불 하나를 켜 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인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그런 그녀가 비로소 또 다른 사랑을 찾아 결혼한다고 하니 얼마나 축복할 일인가. 예순 근처에 있는 노총각 노처녀의 결혼식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흰 머리칼을 새신랑의 젊은 머리로 염색한 남자의 얼굴에는 긴장한 땀방울이 조명에 반짝거렸고 수줍은 듯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얼굴에선 불그스레한 부끄러움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남편의 손을 잡고 행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벅찬 눈물이 흘렀다.
포항 앞바다에서 그들을 떠 올린다. 부부의 인연이란 사랑 그 이상 일 것이라 생각하니 산란한 마음이 해가 돋은 듯 하나로 모인다. 햇볕이 쨍쨍 비치는 날에는 멀리 일본까지 보인다고 하는 언덕을 지나 해파랑길을 걷는다. 해가 있는 곳엔 늘 사랑이 움틀 것이다. 어깨를 감싸며 우산 속으로 끌어당기는 남편의 손이 다정스럽다. 살포시 흩뿌리는 빗물에 젖어 있는 남편의 한쪽 어깨를 의지한 채 파도를 맞는다. 해를 맞이하러 왔지만 사랑을 담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