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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Oct 22. 2023

[5층]

열흘의 계단 - 제3화

향기로운 바람이 커튼을 간지럽히며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간소하고 단순한 조그만 방이다. 한 남자가 책상 앞에서 종이 위에 뭔가를 쓰고 있다. 다가간다. 모르는 얼굴이다. 모를 수밖에 없다. 흰옷에 감싸인 채 하얀 방에서 깨어난 그 이후로, 내가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남자도 <나>를 모를 것이다. <나>가 누구인지만이 아니라, <나>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를 남자는 알지 못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하디 평범한 얼굴은,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인데,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끝에서 뭔가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울고 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이것은, 분명, 눈물이다. 내가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왜일까.


편지다. 남자의 손에 쥔 펜 끝이 그려내고 있는 건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틀림없다. 남자의 표정과 손짓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내용을 읽을 수가 없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지만, 두 눈을 가득 채운 눈물이 글자를 가린다. 답답한 마음속에 비가 내린다. 설명할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에 솟아난다. 저 글자들을 꼭 읽고 싶은데, 눈물에 가려 읽을 수가 없다. 모르는 남자가 쓰고 있는 저 편지 내용이, 난 왜 궁금한 걸까. 그것도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커튼을 간지럽히던 바람이 훅, 별안간 순간적인 돌풍으로 변한다. 남자도 나도 당황한다. 쓰고 있던 편지지가 바람에 날려 천장으로 솟구친다. 당황한 남자가 허공에 팔을 뻗어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건, 남자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보통의 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휠체어에서 남자는 일어설 수가 없어 보인다. 천장 가까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편지지를 잡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몸이 떠오른다. 손을 뻗쳐본다. 그러나 한 번에 잡히지 않는다.


팽그르르 몇 차례 뒤집히며 돌던 남자의 편지가 창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다. 안 된다! 잡아야 해! 편지를 향해 날아가며 마음속으로 외친다.


하지만 편지는 커튼을 스치며 창문 밖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창문이 닫힌다.


툭.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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