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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Oct 22. 2023

[1층]

열흘의 계단 - 제1화

눈을 뜨자 하얗다. 천장과 네 개의 벽, 그리고 등을 대고 누운 바닥까지 죄다 하얗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하얀 방 안에는, 내가 <나>라고 인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관성 있는 하얀색이다. 몸에 걸쳐진 옷도 하얗다. 신발도 하얗다. 불친절한 하얀색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일어서자 하얀 방의 한가운데다. 그것뿐이다. 아마도 <나>일 것 같은 <나>라는 것만이 하얀 방에 담겨 있다. 주머니도 없는 옷 말고는 아무 물건도 없다. 맨 몸뚱이를 감싼 하얀 섬유와 발에 신긴 하얀 신발, 그 외에는 <나> 하나뿐이다.


<나>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가 어떻게 불리는지, <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아무것도 <나>는 알 수가 없다.


몸을 휘감은 건 하얀 윗도리와 하얀 바지, 그 둘이다. 옷깃을 젖히고 알몸을 살펴본다. 그냥 맨몸이다. 아, 하나, 딱 하나가 있다. 목에 걸린 목걸이. 이게 <목걸이>라고 불리는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 본다. 아니, 처음 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하지만 원래부터 이 목에 달려있던 물건일지도 모른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나>는 원래부터 있었다. <나>는 어디에선가 있었고, 그러다 이곳, 하얀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당황스럽지도 두렵지도 않다. 그것은 그냥 그대로 있어야 할 어떤 상태라는 사실이 자연스러웠다. 받아들인다. 이대로, 알 수 없는 이 모두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궁금하다. <나>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고 싶어 진다.


하얀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둘러 살펴본다. 바깥과 연결되는 문은 보이지 않는다. 손이 닿는 곳 전부를 두드려 본다. 방은 높지도 넓지도 않다. 벽 두 개를 다 두드리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세 번째 벽 정중앙이 노크에 응답한다.


문이 생긴다. 이내 열리는 문. 문 바로 앞에는 어딘가로 오르는 계단이 펼쳐져 있다. 열린 문을 지나 첫 번째 계단에 두 발을 올리자, 등 뒤로 문이 닫힌다. 뒤를 돌아본다. 방금 잠시 열렸다 닫힌 문에 검은색 큰 글자. [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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