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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Oct 22. 2023

[3층]

열흘의 계단 - 제2화

계단을 오른다. 계단도 하얀색이다. 꽤 긴 계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눈앞에 또 다른 하얀 문이 나타난다. 문에 손을 대려고 하다가, 멈칫 뒤를 돌아본다.


계단이 사라졌다. 발밑을 내려다본다. 하얀 신발 한 켤레를 지탱하고 있는 마지막 계단 하나만 남기고, 바로 조금 전에 걸어 올라왔던 계단은 모두 없어졌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구나.


[3F] 하얀색 문 정중앙은, 그 문 건너편이 3층이라고 알리고 있다. 아까 그 방이 1층이었는데, 2층은 어디에?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스르르 녹듯 문이 사라지며 몸이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툭,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몸뚱이를 푹신하게 받아낸 것은, 자동차 조수석이다. 차창 밖은 새까맣다. 와이퍼가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쏟아지는 빗방울을 다 걷어내기에는 벅차 보인다. 조수석? 그렇다면 누군가 바로 옆에서 운전하고 있다는 건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자다. 젊은 여자. 옆모습만 보아도 상당한 미모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젊고 세련된 차림의 여자. 이 캄캄한 밤에 세찬 빗줄기를 뚫고 이 여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이 여자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그 답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여자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여자의 눈에는 <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죽어있는 걸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죽었고, 그래서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나>가 죽었다고 가정했을 때,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


<나>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었는지, 그 어떤 의식의 잔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의 죽음이 현실이라 손 치더라도, <나>는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나>의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게 무척 궁금은 하지만, <나>의 죽음이 안타깝지는 않다. 안타깝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은가.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자는 눈을 감고 있다. 눈감은 그녀의 옆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다가, 여자가 손에 잡은 운전대가 눈에 들어온다. 어?


여자는 운전 중에 잠이 든 것이다. 바로 그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거센 빗줄기를 헤치고, 다급하고 날카로운 경적을 앞세우며 차 앞 유리를 향해 대형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달려오고 있다. 중앙선 침범이다. 생각이나 판단이 끼어들 시간이 없다.


운전석으로 손을 뻗는다. 있는 힘을 다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다.


비명 비슷한 트럭 경적 소리가 차 뒤쪽으로 잦아들고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뜬다. 여자는 갓길로 차를 가져가서 멈춘다.


핸들에 고개를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 바로 그 곁에서, 얼떨결에 그녀의 목숨을 살린 나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있던 여자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나, 죽을 뻔했어. 지금, 조금 전에 운전하다 잠깐 졸았어. 나, 벌 받나 봐. 나 어떡해.”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몸이 붕 떠오른다.


다시 하얀 계단에 서 있다.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계단 끝에 이르러 또다시 만난 하얀 문에는 [5F] 글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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