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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Oct 22. 2023

[4층]

열흘의 계단 - 제8화

4층 문을 열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 살갗이 뚫리는 것만 같다.


도로. 가로등조차 없는 1차선 시골 도로다. 저만치 비상등을 켠 채 길가에 주차된 차가 보인다. 빗속을 헤치고 그쪽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날 죽인 그녀다. 윤지선. 서른 초반이나 됐을까. 하얀 계단을 내려가며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랬었지, 생각난다. 3층에서 내가 목숨을 살린 그녀, 윤지선. 나를 죽인 그녀, 윤지선.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어 트럭과 충돌할 뻔한, 바로 그날 그 순간이다. 옷차림이 3층에서와 똑같다.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 옆으로, 조수석에 또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다.


“지선아. 다 지난 일이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이제 그건 세상에는 없는, 세상에 원래부터 없었던 사고야. 그만 잊어버려.”


“오빠, 방금 나 사고 날 뻔한 그때, 나 잠깐 졸다가 누굴 봤는지 알아? 희연이야. 희연이.”


“희연이는 네가 죽인 게 아냐! 내가 죽였지! 그날 덤프 몰았던 건 나야!”


“내가 시킨 거잖아! 내가 그런 미친 소릴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말렸어야지! 친오빠면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야! 희연이한테 은철이 뺏길 수 없다고 울고불고 사정한 게 누군데? 내가 아무리 회칼 밥 먹고 사는 놈이어도,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쉬운 건 줄 알아? 기껏 여동생 소원 들어주고 내가 이런 타박을 당해야 해?”


“일을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 희연이만 없앨 것이지, 은철 씨를 왜 반신불수를 만드냐고!”


“그걸 내가 알았어? 그 차에 희연이만 탄 줄 알았지, 은철이가 운전하고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내려! 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


“정신 차려! 이 년아! 어차피 다 저질러진 일이고,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어! 네년 소원대로 희연이 사라지고 은철이 네가 차지하게 됐잖아! 너 은철이 사랑한다며? 평생 휠체어 타고 살아야 하는 은철이, 이제 네가 보살피면 되잖아! 네가 바라던 대로 된 것 아니야?”


“알았으니까, 가! 가라고!”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 나, 간다!”


윤지선의 차 바로 앞에 세워둔 승용차에 그녀의 친오빠가 올라탄다. <나>도 조수석에 앉는다.


차 안의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겼다. 00:44


빗길을 달리는 차 오른쪽 옆으로, 절벽이 보인다.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이다. 자못 긴장한 듯, 윤지선의 오빠는 속도를 줄인다. 왼쪽으로 구부러지는 커브길.


3층에서 윤지선을 살렸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핸들을 거칠게 오른쪽으로 꺾는다. 윤지선의 오빠가 탄 차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하얀 문을 열고, <나>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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