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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Oct 22. 2023

[8층]

열흘의 계단 - 제6화

9층을 나서자,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계단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제는 의아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계단은 펼쳐졌고 각층의 방문은 열려왔다. 상황은 던져졌고, <나>는 그저 그 상황 속을 더듬어 지나왔을 뿐이다.


하얀 신발과 하얀 옷차림으로, 하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간다. 이제부터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가 보다. 계단 끝 하얀 문에는 [8F]라고 표시되어 있다.


문을 열고 8층에 들어선다. 여기는? 납골당이다.


아까 9층에서 보았던 영정 속 노부인, 그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3성 장군이 된 여자의 아들이 서 있다. 오늘은 제복을 입고 있지 않다. 두 사람은 누군가의 납골함 앞에서 한동안 말이 없다.


“이제 가시겠어요? 어머니.”


“먼저 내려가 있을래? 나, 잠깐 좀 혼자 있고 싶다.”


“좀 더 계셔도 괜찮아요. 저랑 같이 내려가셔도.”


“아니야. 부탁이야. 잠깐이면 돼. 바람 좀 쐬다가, 한 10분 후에 와주면 좋겠다.”


“그래요. 어머니, 혹시라도 몸 힘들면 바로 전화 주셔야 해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들이 뒷걸음질 치며 노부인의 기색을 살피다가 이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이제 여자 혼자만 납골묘 앞에 있다.


“이렇게 널 찾아오는 것도, 아마 이게, 이 세상에서는 이게 마지막일 것 같네.”


말을 잇기가 힘이 드는 듯,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며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댄다.


“평생, 내 죄를 조금이라도 씻으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없어지지는 않아. 나도 알아.”


다시 여자는 말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희연아. 나를... 용서하지 마라. 널 죽인 나를,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되지.”


죽였다고? 사람을 죽였다고? 희연이가 누구길래?


노부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납골함을 서둘러 찾는다. 어디지? 누구지? 이름이 희연?


고 박희연. 1977. 10. 20.~2007. 10. 20.


서른 살 생일에 생을 마쳤을 박희연이라는 여자의 영정에 시선을 멈춘다. 그와 함께 납골함 사이사이를 막은 칸막이의 거울에 <나>의 모습이 비친다. 하얀 방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 보는 <나>의 얼굴이다.


숨이 멎는다. 같은 얼굴이다. <나>의 이름이, 박희연이다.


“다음 세상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 나를 만난다면, 나를 죽여다오. 희연아.”


여자의 호흡이 더 거칠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말을 잇는다.


“날, 용서하지 마. 희연아. 희연아. 정말 미안해. 미안해.”


<나>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된 순간은, <나>를 죽인 이가 누군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하얀 방에서 깨어난 이후로, <나>가 죽었다는 현실을 줄곧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 고요한 평정은 지금 깨지고 있다. 네가 나를 죽인 범인이라고?


생각도 판단도 끼어들 틈이 없다. 두 손으로 여자의 목을 움켜쥔다. 그런데 그녀의 목에서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손이 닿기 전에,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그녀의 아들이 저만치 보이면서, <나>는 아까 들어왔던 하얀 문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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