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러워도 삶이다.
며칠 이어진 장마는 세찼다. 도라지꽃은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이길 수 없었다.
원체 해가 잘 들지 않았던 그늘 속이 갑갑했을 것이다. 빛을 찾아, 빛을 향해 고개를 기우뚱 뻗다 보니 애초부터 줄기는 수직으로 자라지 못하고 45도 기울어 있었다. 그 와중에라도 간신히 기어코 피워낸 조그만 꽃잎은, 그러나 장마 빗방울에 짓밟혀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피어나자마자 아스팔트 바닥에 고꾸라진 몇 송이 하얀 꽃 아래로는, <끝내 오지 않을 펼쳐짐의 순간>을 기다리며 맺혔을 꽃망울이 줄기에 달려 누워 있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은 ‘마츠코’의 조카 ‘쇼’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꿈을 꾸는 건 자유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고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은 극소수. 그러니까 그 외 대다수는 슬픈 한숨을 짓거나, 술독에 빠져 있거나, 일찌감치 인생을 끝내거나, 웃어넘기거나. 뭘 해도 인생이 캄캄하다.
중학교 여교사 마츠코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수학여행에서 도둑으로 억울하게 몰렸을 때였다. 그때 그녀는 혼잣말을 읊조린다. ‘그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직장을 그만둔 그녀가 동거하던 연인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生れて、 すみません。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광경을 목격할 때 그녀는 내뱉는다.
‘그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다시 만나게 된 남자를 살해한 직후에 그녀는 또 말한다.
‘그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 거센 비가 쏟아지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다 얼결에 붙잡은 난간 기둥에 매달린 마츠코는 다시 또 독백한다.
‘그래도 아직 내 몸은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살고자,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몸부림쳤던 그녀의 삶은, 결국, 엉망진창으로 이어지다가, 향년 53세 살해당한 강변 변사체가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 정도면 신(神)의 심술궂은 장난질이지(!)’ 싶은 그녀의 만신창이 인생 여정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하기가 불편하다. 일견, 말 그대로 혐오스러운 일생이다.
하지만,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건, 마츠코의 ‘삶’이지, ‘마츠코’가 아니다. 엉망진창인 운명을 어쨌거나 뚫고 나아가려 기를 쓰며 몸부림친 그녀는 전혀 혐오스럽지 않다.
그리고, 그녀가 혐오스럽지 않기에, 그녀의 삶 또한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게 어떤 모양이든 어떤 색깔이든. 그것대로 그녀의 삶이고, 그것대로 제 나름대로 빛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누워버린 꽃도 꽃이듯, 찢긴 꽃도 꽃이다.
이루지 못한 꿈도 꿈이다.
꿈은 꿈으로만 머물러도 충만하고, 볼품없는 삶도 하나의 완전한 삶이다.
“당신 인생은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