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항을 옆으로 불턱들이 몇 군데 있다. 불턱의 기능은 여러 차례 이야기 들은 바 있어 알고는 있지만, 그 내부 구조가 궁금했다. 물때에 따라 불턱까지 물이 차 있는 경우가 많아 시간대가 맞지 않으면 불턱을 구경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마침 불턱까지 물이 빠져서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조천에 온 이래로 처음으로 현지인(?)이 먼저 내게 말을 붙여 왔다. 간단한 옷차림으로 불턱 가는 바닷길을 듬성듬성 걸어가는 나를 보고 그분도 아마 내가 현지인인지 알았을지도 모른다. 조천이 고향이라는 노인은 한 동안 어릴 적 친구들과 바로 이곳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맥질하며 놀던 기억들을 쏟아내었다.
나는 마치 그분의 기억들을 반드시 귀담아 들어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보다는 10년이 위인 노인은 아마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태어나서 전란 중에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녹녹지 않은 삶을 일구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나보다 10년 먼저 힘든 전후 상황에서 살아오신 것, 그리고 후생들이 좀 덜 힘들게 살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한 일종의 감사의 의미일 수도 있었다.
노인은 이야기 중간에 간혹 눈씨울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려 먼바다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돌아서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 어릴 적 친구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참을 조천 이야기를 한 후 불턱을 지나서 밀려나는 물가를 바짝 따라갔다. 그리고 곳곳을 향해 셔트를 누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찍어내려는 듯 느껴졌다. 그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어릴 적 추억까지 찍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