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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Sep 04. 2021

초록이 필요해

원글 작성일 21년 6월 8일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사용하던 노트 첫 장 왼쪽 페이지에는 연한 에메랄드색으로 한 면이 가득 찬 면이 있었다. 공부하느라 피곤해진 눈을 쉬게 해주는 용도라는 엄마의 설명에도 나는 그 페이지가 도대체 왜 있는 걸까 늘 궁금했다. 그 페이지를 들여다볼수록 눈이 가운데로 몰려 더 어지럽기만 할 뿐 어떻게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21년 봄은 잦은 비로 안 그래도 짧은 봄꽃을 구경도 할 새 없이 잠깐 머물다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에 벚꽃이 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꽃이 있던 자리에 돋기 시작한 여리고 작은 잎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점심시간에 식당에 가는 짧은 길목에 늘어선 가로수를 올려다보며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는 싱그러움을 느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봄이 깊어가고 여름이 다가올수록 초록빛도 깊고 진해져 간다. 나뭇잎 색이 연한 연둣빛에서 연두로, 연두에서 초록으로, 초록에서 진초록으로 변해간다. 4월 5월의 연한 연두색 잎은 자라나는 부드럽고 생생한 느낌을 주는 초록이고, 6월의 초록색은 파란 초여름 하늘과 어우러져 여름의 초입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초록이고, 7월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매미 울음을 품은 진초록색은 생장과 성숙을 알리는 초록이다. 초록이라고 모두 같은 초록은 아니었구나.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가 새롭고 재미있어 자꾸만 눈이 간다. 매일 지나다니기만 하던 가로수길을 이제는 바라보며 걷는다. 나무가 내 일상의 풍경에서 대상이 되었다.


 꽃만 보았지 꽃이 피기 전에도 있었고, 꽃이 진 후에도 늘 같은 자리에 있던 나뭇잎의 초록이 이렇게 변해간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니 놀랍기도 하고 나뭇잎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꽃만 눈부신 줄 알았는데 꽃이 피기 전에도 지고 난 후에도 모두 꽃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봄이나, 나뭇잎이 노랑, 빨강으로 화려하게 변하는 가을에만 나무에게 눈길을 주었던 과거의 내가 야속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지는 말 그대로 ‘힐링의 초록빛’이다.


 얼마 전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왔다. 모였던 친척들이 떠나고 홀로 마당 소파에 앉아 식혜를 마시며 비 오는 농촌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문 열면 '옆집 창문 뷰'인 서울 우리 집과 달리 환하게 트인 시야 전체를 논이 꽉 채운 초록색 ‘논 뷰’다. 논 주변으로는 우리 할머니가 가꾸는 작은 밭도 있고, 지금 집으로 이사 전 살았던 옛집도 있고, 뒷산 입구에 엄마가 어릴 때 많이 따먹었다는 감나무도 있고, 건물이나 전선에 가리지 않은 하늘도 있다.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약간 흐린 하늘이 어둑해지는 모습을, 초록빛 나무들 사이로 어둠이 조금씩 가라앉는 모습을 바라본다. 최근 몇 년간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이다. 큰 나무 속에서 부슬비를 피하며 지저귀던 새들이 파드득 하늘로 날아가며 만든 파동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파란 하늘을 유영하듯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힘들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단 한 번도 여유롭게 할머니 댁 마당에 앉아 풍경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초록이 주는 평온함을 보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살았거나, 그 평온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겠구나 싶다. 사람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아 꽉 막힌 마음에 비로소 한 줄기 바람이 통한다.


 도시로 돌아와 모니터 앞에서 꼬박 8시간 이상 앉아 일한다. 점심을 먹고 날씨가 좋은 날은 잠시 회사 주변을 산책한다. 산책길이라 해봤자 횡단보도가 많아 걷는 시간만큼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긴 것 같은 대로변을 걷다 돌아오는 정도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가로수 잎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바람을 느끼고, 구름도 보고 하늘의 푸른빛도 본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밖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알 수 없는 건물로 다시 들어간다. 산책길에 나무를 볼 때, 하늘을 볼 때 내 시야는 저 멀리까지 닿아 있었는데 사무실로 돌아오니 내 눈 30cm 앞 모니터만 본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건조해진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다. 눈물마저 인공으로 만들어 넣어 촉촉해진 눈으로 다시 모니터를 본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초기화면 잠금 설정은 주기적으로 자동 변경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어느 날은 바다, 어느 날은 산, 어느 날은 초록빛이 가득 찬 어느 외국 들판 풍경 등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세계의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사이버 피톤치드인가?’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나도 모르게 모니터를 멍하니 사진 속 평온한 풍경을 바라본다. 몸은 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사진을 보며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끼길 바라는 프로그래머의 배려일까. 이렇게나마 우리 일상에 자연을 끼워 넣어준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의 초록 할당량을 조금 채운 느낌이다.


바쁘게 일을 하다가 문득 점심 산책길에 마음에 담아둔 초록 한 조각이 마음에 남아 아른거린다. 눈에만 담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마음속에 들어왔는지 속이 간질거린다. 주말에는 꼭 안양천 산책길이라도 걸으며 마음을 달래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에서야 왜 노트 앞에 초록 면이 있었는지 알 것 같다. 공부하느라 활자를 많이 보아 피로해진 아이들의 눈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트를 만드는 지친 어른들의 마음에 초록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 댁 마당에서 보았던 눈에 꽉 찬 ‘논 뷰’와 노트 초록면이 절묘하게 겹쳐지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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