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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한 줄에 추억 하나

by 해야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다. 왜 그런지 몰랐는데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니 요즘 김밥이 생각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인 영우가 늘 김밥을 먹고, 그의 아버지 김밥 가게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먹는 김밥을 보며 입맛을 다신 일도 없는데 어쩐지 김밥이 너무 먹고 싶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김밥 가게에 갔다. 오랜만에 찾은 가게에는 직원 대신 입구에 키오스크가 맞이한다. 요즘 잘 나가는 메뉴는 밥 대신 지단을 넣은 키토 김밥인가 보다. 만년(입으로만) 다이어터인 나 역시 탄수화물인 밥을 많이 먹는 게 부담스러워 조금 더 비싸지만 키토 김밥을 택했다. 가게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앉아있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3년 전, 회사에서 한참 힘들었던 시절에 내 앞자리에 앉았던 직원이 있다.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많고, 직급도 한참 높은 상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대해주었고, 동시에 늘 존대해주었다. 우리는 봄과 가을에 종종 점심시간에 김밥을 사서 남산이나 안산에 가서 김밥을 먹고 돌아오곤 했다. 둘 다 산책과 등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일, 그것도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셔 점심 산책을 좋아했다. 사무실에서 산까지 거리가 좀 있는 편이라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그만큼 점심시간을 더 길게 가지는 유연근무를 사전에 신청하여 2시간 정도 점심시간 일탈을 할 수 있었다. 산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포장한 김밥을 한 줄씩 들고 산에 가서 적당한 의자나 정자에 자리 잡고 김밥을 펼치고 소풍 온 기분으로 점심을 먹었다.


꽤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햇빛도 바람도 적당한 자리는 이미 등산 고수들이 먼저 점령했고, 남아 있는 자리는 햇빛이 정면으로 내리쬐거나, 길과 인접해 밥을 먹다 고개를 들면 오가는 등산객과 눈을 마주치는 자리다. 어쩔 수 없이 자리 잡고 김밥을 먹기 시작하면 개미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내 몸으로, 김밥이 담긴 상자 위로 오르려는 개미를 쫓으며, 동시에 시간에 쫓기면서도 말을 끊임없이 하며 김밥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2시간이라고 해도 이동거리와 김밥집에서 기다린 시간을 합하면 꽤 빠듯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날계란을 돌리기 전에 노른자를 두어 번 콕콕 찔러주어야 터지지 않는 것처럼 그 시간은 외부 압력에 꽉 막혀 터질 것 같았던 내 노른자에 숨통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얀 밥알 대신 노란 지단으로 테두리를 채운 김밥이 나왔다. 알루미늄 포일로 돌돌 싸서 꽁다리에 우엉이 튀어나와야 제맛인데 요즘 김밥은 참 가지런하기도 하다. 종이 상자에 예쁘게 담겨 나온 김밥을 보고 환경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포장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싶다가도 한 줄에 5천 원이 넘는 가격을 생각하면 이 정도 포장은 해주어야 고객에게 고급 김밥의 이미지를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 회사 근처에 인기 있는 분식집에는 지단 김밥, 더덕 김밥, 시래기 김밥 등 특색 있고, 먹으면 건강해질 것 같은 김밥을 팔았는데, 가격은 4천 원~7천 원 사이였다. 이게 작년 기준이니까 올해는 더 올랐을 수도 있겠다. 식사 여건이 마땅치 않을 때 가볍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한 줄 천 원 서민 음식에서 프리미엄 판매 전략을 업고 변해간다.


고등학교 때 무척 좋아해서 여러 과목 강의를 들었던 사회탐구 영역 인터넷 강의 강사가 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그는 강사가 되기 전 몇 년 동안 사법고시 공부를 했는데, 낙방을 거듭하고 결국 강사가 됐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며 식사 시간도 아끼려고 김밥을 먹은 기억이 있어 지금은 김밥을 먹지 못한다고.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김밥을 갖다 줄 때가 있는데, 거절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강의 내용은 싹 다 잊은 지 오래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난다.


한국인이라면 김밥에 대한 추억은 모두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즐거운 나들이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락의 상징이고, 누군가에겐 바쁘게 살던 시절 간단히 끼니를 때우던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일 테다. 학창 시절 내내 소풍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싸준 엄마가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김밥을 보니 남산에서 시간에 쫓기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 말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합죽이가 됩시다 합! 하고 입에 지퍼를 채워버린 것처럼 하루 종일 침묵 속에 근무하다가 입에 채운 지퍼를 열고 발언을 허락받은 것처럼 떠들던 그때는 소풍 간 아이만큼 신이 나 있었다. 미세먼지도 없고, 날씨도 적당히 선선한 그날, 남산 자락에 앉아 김밥을 먹으면서 머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뚫린 숨구멍을 시원하게 통과하던 그 시절 그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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