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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의 추억

by 해야

마트에, 시장에 동글동글한 작은 초록색 열매가 진열되기 시작하면 내 가슴도 뛰기 시작한다. 연례행사 매실장아찌 담그기를 해야 하는 묵언의 책무가 내 마음을 옥죄기 때문이다. 비슷한 음식으로는 훨씬 강도가 높고 시간도 긴 노동은 김장이 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누군가는 호빵을 생각하겠지만 나는 김장을 생각한다. 여름과 겨울에 각각 내 체증을 담당하는 두 음식은 할 때는 이가 갈리게 힘들지만 결과물을 보면 별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매실 장아찌는 효능도 좋지만 무엇보다 맛이 좋다. 삼겹살처럼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한 입 먹으면 새콤하게 끝 맛을 정리하고 입맛을 돋운다. 장아찌를 건져내고 남은 매실액은 요리할 때 설탕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만능 조미료가 된다. 더운 여름날에는 차가운 생수에 매실액을 넣고 얼음을 넣어 휘휘 저어주면 시원하고 상큼한 음료가 될 뿐만 아니라 소화도 돕는다. 이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만들 수밖에.


사실 우리 집은 매실장아찌는 따로 담그지 않고 매실 청만 담아 사용했다. 장아찌를 처음 먹은 건 태국 해외봉사를 갔을 때였다. 방콕에서 4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2주 동안 봉사활동을 하면서 밥은 현지에서 짓지만 반찬은 한국에서 가져온 것들로 해결했다. 나는 오징어채 무침과 멸치조림을 진공 포장해 가져 갔고, 한국에서 챙겨 온 아이스박스에서 매일 단원들이 각자 챙겨 온 각종 반찬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매실장아찌였다. 동남아시아에서 사용하는 안남미로 지은 찰기 없는 밥에 질려가고, 더운 날씨에 입맛을 잃어가고 있을 때 등장한 매실장아찌는 눈을 번쩍 뜨게 했다. 그날부터 내 밥 메이트가 된, 새콤 달콤한 여름을 그대로 담은 아삭함에 매콤한 고추장과 고소한 참기름 양념을 입은 장아찌를 상상하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그때부터 내 밥상에는 김치처럼 매실장아찌를 곁들이게 됐다.


매실장아찌를 담그려면 일단 알이 크고 싱싱한 매실을 구매해야 한다. 조각을 내야 하므로 청을 담글 때보다 알이 큰 게 좋다. 좋은 매실을 구하려면 인터넷으로 손품을 팔거나, 시장에 가서 발품을 파는 일이 필수다. 다음엔 물로 깨끗하게 세척해야 하는데 이 과정부터가 쉽지 않다. 은근히 무거운 매실을 큰 대야에 넣고 물을 부어 씻고, 새 그릇에 옮기고 씻고 반복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체력을 요구한다.


씻기가 끝나면 체에 올려 물기 없이 잘 말려야 한다. 잘 마른 매실을 바구니채로 거실 바닥에 넓게 깐 신문지 위에 올려두고, 칼과 매실을 담을 큰 통을 준비한다.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도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호흡이 그다지 빠르지 않은 예능프로나 드라마를 손이 더러워지기 전에 미리 틀어두면 준비가 끝난다.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앉아 매실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매실에 칼집을 깊게 넣고 힘을 주어 3-4조각을 낸다. 최대한 씨에 붙은 과육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요령이다. 이 과육을 큰 통에 넣고 설탕과 1:1 비율로 섞어 숙성시키기만 하면 끝이다.


이렇게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과육을 잘라내는 과정이 매실 장아찌 담그기의 8할을 차지한다. 정말 지겹고 지치는 단순 노동이다. 손과 다리의 저림을 곁들인. 몇 시간이고 바닥에 앉아 매실을 조각내고 있다 보면 칼을 쉰 손은 힘을 주는 곳을 따라 벌겋게 자국이 나 있고, 그 모양대로 손이 굳기도 한다. 다리가 저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야 한다.


더 쉽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매실 쉽게 까는 법이 50가지쯤 나온다. 그중 망치로 깨라, 매실 깨는 도구 추천, 가위로 쪼개는 법, 집게로 쪼개는 법 등 각자의 노하우가 쏟아져 나온다. 다들 매실 까기가 힘들어서 자기만의 방법을 발견해 낸 것이다. 이리저리 다 해봐도 힘만 더 빠질 뿐, 칼로 손질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결론에 닿아 다시 칼을 들고 눌린 자국이 남은 부분을 눌러내며 아픔을 인내해내야 끝나는 작업이다. 혼자 먹을 양이면 이렇게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먹는 사람은 여럿인데 하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는지 그건 왜 항상 나인 건지.


나이가 들었는지 과거와 비교하면서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매실 장아찌를 담그면서도 매 번 생각한다. 이젠 여름에 매실을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는 매실 까는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실 꼭지를 따는 일도, 쪼개는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 깐 매실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이다. 생산지에서 수확한 매실을 바로 기계로 씻어 씨를 뺀 매실을 집에서 하던 것처럼 한 입 크기로 조각낸 상태로 진공 포장하여 아이스팩과 함께 보내준다. 상품 설명에 따르면 조각내는 일도 기계가 하지만, 한 알 한 알 수작업으로 직접 기계에 넣는 방식인 것 같다.


내가 할 일은 진공 포장지를 뜯어 통에 붓고 설탕과 1:1 비율로 섞고 뚜껑을 닫아 숙성시키는 것이다. 뜯고(매실), 붓고(매실), 뜯고(설탕), 붓고(설탕) 비비고 닫고. 여섯 어절로 설명이 끝나는 단순한 작업으로 아삭아삭하고 상큼한 반찬인 동시에 천연 소화제를 만들 수 있게 됐으니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신이 나서 매실장아찌 담그기 즉석 시조를 읊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기술 만세, 기계 만세다!! 이럴 거면 사 먹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 먹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사 먹는 장아찌는 생각보다 비싸다), 설탕 비율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음식은 정성이 들어간 만큼 맛있다고 하지만 이젠 꼭 정성과 맛이 정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내 정성 대신 판매자의 정성이 가득 담겨 있으니 동률인 건가. 음식도 요리도 단순노동도 좋아하지만 정성과 시간을 돈과 기술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게 그저 행복하다. 요리도 음식 섭취의 과정도 누군가의 일방적인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올해도 매실장아찌 담그기는 통 닦기와 바닥 청소까지 포함해 20분에 끝냈다. 기쁘게도 매실 까던 일은 추억이 되었다.


내가 할 일은 끝났고, 다음 일은 매실과 설탕에게 맡긴다. 매실은 통 안에서 꽉 쥔 주먹처럼 쥐어 두었던 여름의 향그러움을 조금씩 풀어내 달콤하고 상큼한 매실청을 만들어 줄 것이고, 설탕은 말없이 도와줄 것이다. 딱딱하고 신 맛이 나던 과육은 아삭하고 달콤해져 입맛을 돋우고, 체기를 내려 줄 것이다. 100일을 기다리기만 하면 이 마법 같은 여름의 맛을 오래오래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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