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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0. 러닝 크루와 함께 뛰기

연구소 크리스마스 오찬

by 에스더

2024.12.11. (수)


지난주부터 계속 연구소 담당 교수님에게 연락해서 화요일에 겨우 회의를 잡았는데 휴가 후에 복귀하니 목이 따끔거린다고 회의를 취소해서 결국 오늘 크리스마스 오찬 후 짧게 회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에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 바로 연구소로 왔다. 그러나 역시 시간에 맞춰온 사람들은 몇 명 없었고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에야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했다. 먼저 돌아가면서 털실을 던지고 간단한 자기소개와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추억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나도 차례가 되어 자기소개를 하고 한국에서는 사실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크게 보내지 않아서 올해 25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빵 굽는 장갑을 끼고 겹겹이 포장되어 있는 선물을 뜯는 게임을 했다. 한 사람당 시간제한이 있어서 계속 차례를 넘기며 뜯다가 마지막 포장을 뜯는 사람이 선물의 주인이 되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카훗을 활용한 크리스마스 상식 퀴즈를 하였는데 스페인어 이슈로 나는 다른 교수님과 같이 페어가 되어 퀴즈에 참여하였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으로 계속 1등을 하다가 마지막 한 문제를 틀려서 4등으로 게임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1등을 한 우리 프로젝트 담당 교수님이 상품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크리스마스 오찬이라고는 했지만 결국 먹은 것은 햄버거 세트였다. 대신 후식으로 또 레몬파이를 먹었는데 이로써 3일 연속 레몬파이를 먹게 되었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랩실 이름이 박힌 꽤 멋진 텀블러를 하나씩 선물로 받았다. 이제 드디어 회의를 하나 했더니만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 있으면 뒷정리를 하고 사무실로 넘어오겠다고 했다. 12시에 만났는데 결국 4시 30분이 넘어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렵게 만든 자리였지만 한 20분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에스떼르는 muy correcto하고 muy formal하다고 했다. 지금 벌써 연말 연초에 아마 이제 곧 사무실들이 모두 문을 닫고 내년 1월 둘째 주 즈음부터 다시 일하기 시작할 텐데 발등이 뜨거운 것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푸쉬를 하자니 서류상으로만 따지면 사실 아직 계약도 안된 파트너사라 이 이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이 즈음했으면 회의는 됐고(뭐가 된 건진 모르겠지만) 연말에 뭐 하니? 하는 질문에 친구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에 바닷가에 다녀올까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연말은 절대 혼자 보내서는 안 된다고 본인 집에서 31일에 파티를 하니까 꼭 오라고 했다. 속으로는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겨우 하는데, 또 파티라니!? 싶기도 했지만 우선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말씀드렸다.


오피스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다 같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교수님 춤추시는 거 봤는데 내 인생엔 이렇게까지 행복한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아주 행복한 얼굴로 춤추는 게 멋지다~ 했더니 표현 점수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하셨다. 이럴 수가! 행복 1등 코스타리카의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했는데 그저 프로 댄서였던 것이다. 나도 감명받고 요즘 춤을 배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들 박수 치면서 여기선 춤을 추지 않으면 절대 연애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분명 스페인어 수업 때 아르헨티나에 계신 선생님에게 춤추냐고 물어봤을 땐 라티노들이 모두 춤을 좋아한다는 것은 한국인들은 모두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것(심지어 이건 한국이 아니라 일본 아닌가)과 비슷한 스테로타입이라고 했는데 적어도 코스타리카에서는 스테로타입이 아니라 진짜였던 것 같다.


그렇게 회의답지 못한 회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러닝용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다.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보던 러닝 크루가 오늘 이 대학 캠퍼스를 뛴다고 해서 나도 참가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만나기로 한 시간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한 15분에서 30분 정도 지나니 한 두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 같이 간단히 몸을 풀고 캠퍼스를 따라 5km를 달렸다. 너무 오랜만에 달린 탓도 있지만 업힐구간이 너무 많아서 정말 힘들었다. 적어도 6분 30초 페이스로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어플을 확인하니 거의 7분에 가까운 페이스로 아주 천천히 뛰고 있었다. 더 빠른 페이스 그룹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내 뒤로 와서 같이 뛰어주셨다. 감사하면서도 자꾸 말을 거셔서 힘든 와중에 또 스페인어로 문장을 만들어 대답하려니까 너무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지만 또 그 순간에는 잠깐 힘든 걸 잊고 말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중간에 멈추지 않고 마지막까지 뛰어서 5km를 채울 수 있었다.


모두 출발지점으로 돌아온 뒤에는 간단하게 뒤풀이를 했다. 학교 앞에 있는 바에 갔는데 오늘 원래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가 회의가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약속을 취소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바에서 놀고 있었다. 이렇게 학교 앞 술집에서 아는 친구를 마주치다니 내가 지금 산페드로에 있는 건가 안암에 있는 건가? 어제 릴스에서 한국에서 어렵게 치차론 chicharron을 만들어 먹는 모습을 보고 나도 내일 꼭 먹어야지! 했던 게 생각나서 주문을 했다. 음식을 받고 보니 내가 순간 치차론 chicarron과 초리조 chorizo를 헷갈려 그저 소시지를 주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나고 집이랑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에 걸어가려고 했는데 어두워서 위험하니 다른 친구가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로 때문에 다른 사람들 집에 먼저 내려주고 돌아가야 해서 걸어서 10분 거리를 차 타고 30분도 넘게 걸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오고 가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스페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자꾸 나가서 달리고 싶은데 혼자 뛰면 왠지 중간에 금방 멈춰버릴 것 같기도 하고 어딜 언제 뛰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서 달리기 쉽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뛸 수 있는 자리들이 있으면 자주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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