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림 Aug 12. 2022

사대부 여인

경험하지 않은 시공간(초단편)

"게 섰거라!"

"예?"


어쩐지 마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살짝 지나가려는 데 딱 걸렸다. 누룽지가 좀 있다고 하길래 잠깐 들렀는데 그게 뭐라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마님의 생각엔 내가 무슨 나쁜 일이라도 한 거라 생각한 걸까?


"어멈한테 일러 놓을 테니 미역 갖고 가거라. 얼마 전 몸을 풀었다지?"

"감사합니다, 마님."


가끔 우리 집 일을 도와주는 이천댁이 얼마 전 다섯째를 낳았단다.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남편이라는 작자는 매일 노름판에서 헤매고 있다고 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를 낳았다는데 돌봐 줄 사람도 없고 밑으로 아이들만 줄 줄이니 얼마나 힘들지 눈에 밟힌다. 미역을 가져가서 몸을 추스르는데 쓸 수 있게 보냈다. 사는 게 모두 만만치 않다. 형편이 어려우면 둘이 힘을 합쳐서 살아내면 좋으련만 사정이 모두 같지 않다. 곁에 있어 챙겨 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아범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장작이라도 한 짐 들어다 주라고 해야 하는데, 몸이 따뜻해야 얼른 일어날 것이다. 여름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마당에 있던 매실 단지를 옮겨야 하는데 누구 하나 보이질 않는다. 부엌에라도 갖다 놔야 필요할 때 사용하는데 여간해선 보이질 않으니 행랑 어멈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야겠다. 미리 쌀을 불려 놓으라 했는데 신경을 안 썼더니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내일 떡을 한 가마니 해서 돌릴 생각이다. 그런데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동네 힘들게 사는 이들에게 조금씩 나눠주라 일러야 하는데 집안 식구들이 모두 들러붙어서 해도 쉽지 않다. 나라님도 이렇게 어려운 때는 어떻게 할 수 없으리라.


서당에 간 아이들이 돌아와서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 자기 본분을 모두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구태여 말만 할 수 있겠는가. 싸리나무를 꺾어 오라 일러야겠다. 귀한 자식일수록 엄히 단속하라 하더니 정말 세상만사 쉽지 않다. 영특한 머리로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지혜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안타깝다. 잘 익은 참외가 단맛이 들어 잘 깎아 들고 가 곱게 타일러야겠다. 자식의 일이 맘대로 되지 않는구나. 옛 성현의 말씀이 '헛된 것은 없다' 하시니 지금부터라도 잘 듣고 말씀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면 좋으련만.


날이 저물어 가고 있으니 어서 곡식을 거둬들이라 일러야겠다.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내일 입을 관복 준비도 하라 명해야겠다. 작은 것이라도 알아서 하면 좋으련만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니 내가 근심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대부의 아녀자로 사는 게 쉽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