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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Sep 05. 2022

억새가 일렁이는 풍경

가을이면 문뜩 떠오르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계절의 손 바뀜은 옷차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업 가는 길에 보니 사람들의 매무새가 긴팔로 바뀌어 있다. 9월이 아니던가. 이른 명절을 앞에 두고 바쁜 발걸음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분다. 계절은 참 오묘하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저녁 찬바람이 불고 처서가 지나면 낮에도 기온이 내려간다. 비 내린 뒤 아침 이슬처럼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도 들어가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재채기 소리가 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느끼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를 처음 가본 건 20대 직장 다닐 때였다. 엄마와 둘이서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에 중문에 숙소를 잡고서 식물원, 산굼부리, 민속촌도 다니고 말도 타보았다. 그때 갈대와 억새도 구분 못하던 시기였는데 갈대는 물가 습지에 자라고 억새는 산 중턱 너른 평지에서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에서 처음 보았던 억새는 오름 중턱의 일렁이는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은빛 물결을 만들었다. 푸르름이 짙은 가을 하늘 아래 춤추듯 이는 하얀 억새를 보는 것은 그곳에 서있는 나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렇게 가을은 억새와 함께 내게로 왔다.


매번 가을이 오면 제주도 푸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오름에 올라 빛나는 물결의 출렁거림을 보고 싶다. 매년 제주의 가을 하늘을 마주할 수 없을 땐 어김없이 하늘공원에 간다. 하늘이 더없이 맑고 푸르러 구름 한 점 없는 계절이 되면 온통 하얀 물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있다. 억새밭 사이로 펼쳐진 숨 막히듯 너른 평원의 흔들리는 바람을 맞고 싶기 때문이다. 풍력 발전기가 도는 시야가 훤한 평지 사이로 걷는 연인들도 있고 삼삼오오 무리 지어 사진에 담아보는 즐거운 풍경도 있다. 가끔 제주 하늘처럼 비행기도 지나는 걸 볼 수 있다.


어슴푸레 저녁나절 해가 뉘엿 넘어가며 날 좋은 시기엔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볼 수 있다. 한강을 배경으로 검붉게 지쳐가는 노을 속에 흔들리는 바람과 억새가 어울려 내는 저녁 하늘이 있다. 하늘 공원에 가려거든 오후에 다녀오시라 권하고 싶다. 좋은 날 간식과 물 조금을 챙겨서 힘껏 걸어서 계단을 올라도 좋고, 힘들면 맹꽁이 열차를 탈 수도 있다. 올라가서는 월드컵 공원과 전망대를 보고 시원한 한강 바람을 맞으라 해야지. 저녁이 되어 뉘엿 해가 넘어가면 연인이 아름답게 보인다. 꼭 제주의 하늘과 비슷하기에 굳이 가보시라 권한다.


올해도 내게 사치 부릴 시간을 주어야겠다. 높은 전망대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넓게 펼쳐진 억새밭을 사이에 두고 햇빛을 받으며 걸어도 좋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그렇게 실려가고 싶다. 해가 뉘엿 넘어가면 시차에 따른 노을 진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봐야지. 조용한 풀내음과 더불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저녁이 깊게 내려앉은 풍경도 좋고 해진 뒤 반짝이는 야경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가끔 한강에 불꽃놀이를 하면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 횡재도 누릴 수 있다. 벌써 가을이 쿵 하고 내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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