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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과 포옹

by 린ㅡ


생각지 못한 날이 있다. 일상, 그것은 가늠하지 못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세 명의 남자와 살아가는 삶을 상상했던 적이 없고, 우울한 은둔자로서의 삶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 세밀하게 다음날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하더라도 생각지 못한 이상한 날로 가닿고 말았다. 미련스레 매번 예측에 실패했고. 그럼에도 예측불가능한 일상이라는 전장 속에서는 매일매일을 헤아리고 준비하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거실에 첫째 아이와 나, 둘만 있다는 것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어젯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숙제를 하고 있었고,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 아이가 얄궂게 제조해 내는 소음을 차단하고 그림을 그렸다. 문득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고, 내가 고개를 들려던 찰나, 그가 허리를 굽혀 앉아있는 나를 꼭 안았다.


사춘기산의 반쯤 올라 잠시 걸터앉아 있는 듯한 아이는 길었던 겨울방학 동안 훌쩍 자라 신체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거대한 어른의 몸이 되어버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전에 없이 따뜻했다. 깊은 곳에선 아기향이 났다.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아이는 사랑한다고 했다. 꿈결 같았다. 나는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가늠하지 못한 순간들 중 이번만은 어느 조각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습과 향기를 담고 어색한 숨결과 보드레한 감촉마저 고이 맘에 눌러 담았다. 11시 48분. 언제나처럼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직을 한 지 3년이 넘어간다. 아침 일곱 시 출근과 자정의 퇴근. 직장을 다니는 동안 아이들을 살갑게 돌보지 못했다. 삶을 살아가는 일이 살아내는 일로 변질되고, 그것마저 버거워 속을 파내고 버리며 스스로를 전부 소멸시키고 나서야 직장을 그만두었다.


처음으로 나의 마음으로 선택한 일, 책임져야 할 것들만 남은 것 같은 두려움. 나의 껍데기만 두른, 내가 아닌 내가 해낸 일이므로 어쩌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달려드는 비난이나 조롱 같은 것들에 망상 어린 도피를 하곤 했다. 그것도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고, 존재하고 있으나 무존재한, 그런 내 곁에 가엾은 아이 둘이 있었다.



아이들이 한껏 자고 있을 때 출근하고, 겨우 잠들었을 때 퇴근하던 삶.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돌보아주셨다. 촘촘한 기한을 두고 떨어지는 고지업무나 예측할 수 없는 소송, 민원, 감사 등으로 감히 나는 육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사직 후 마주한 아이들은 예전에 내가 알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알던 엄마가 아니었을 테고, 나는 매일을 함께 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일상을 긴밀하게 섞지 못했던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으로 속이 빈틈없이 메워진 할머니와 달리 속을 여지없이 비워낸 엄마 때문에 아이들은 힘들었을 테고, 나 역시 보이지 않는 선이나 내밀한 경계를 넘어버린 것 같은 아이들의 모습에 괴로웠다.


결국에는 '나 때문이야'로 귀결되어 불멸하는 자책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시험문제의 오답풀이처럼 단번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마주하고 알려주고 부딪히고 타이르고 같은 일들을 3년 넘게 해오고 있던 터였다.


3년이라는 시간, 그것은 결코 짧지 않았다. 나 때문으로 도착한 현실에서 매일 매 순간 부딪히고 수정하는 일을 쉼 없이 3년이 넘도록 하는 일은 고되었다.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들을 수정하는 일은 몇 배의 시간과 품이 들었다. 사직으로, 직장으로부터 도망해 온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무심히, 무책임하게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벌을 받는 거라 생각했고, 어제도 역시나 야무지게 죄입던 밤, 그가 내게 온 것이다.



그런 날도 있다. 슬프고 고단한 무수한 날들 중에 과연 이런 날도 있더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뜩한 슬픔에 파묻혀 나의 사랑은 힘이 없을 거라고, 내가 전하는 것들이 그들에겐 결국 고운 모양새로 가닿지 못할 거라고 타박했건만. 사랑이나 성심, 희망이나 노력과 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가만하게 힘이 셌다.


알싸한 사춘기의 수류탄을 내게 마구마구 던진다고 하여도 한동안 괜찮을 것 같았다. 너의 살보드라운 포옹 한 번, 그것이 그렇게나 좋았다.




여느 때처럼 다음날의 아침을 미리 준비해 두었고, 아이들의 약을 꺼내 놓았으며, 그들이 벗어 던져둔 안경을 닦아두었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그들이 사라진 식탁엔 온갖 음식 조무래기들이 눌러앉았고, 모르게 떨어진 알약은 바닥을 뒹굴었으며, 찢긴 약봉지의 반은 쓰레기통에 위태로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들의 곁에서 해주지 못했던 일들을 그저 해보고 싶다. 부질없고 무용해 보일지라도. 매일을 하여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그 일들을 서운하지 않게 해보고 싶다.



삶이라는 예측불가능한 전장 속에서 매일을 헤아리고 준비하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나는 여전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나 그러다 보면 어젯밤처럼 가늠하지 못한 보물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오늘도 소리 내지 못한 미약한 사랑을 바지런히, 미련스레 전해본다. 결코 알아채지 못하도록 가뿐하고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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