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셀렘, 기대, 불안, 두려움과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공존하는 일이자 스스로도결코 소홀해질 수 없는 일.
끝내려는 마음,
이것이 시작하는 마음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나는 오래 걸렸다. 다시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마지막을 굳이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도중요한지, 나는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수능을 치르고 서울대가 아니고서는 서울로 보내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서울대'가 아닌 '서울 소재'의 대학에 합격했다.대신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기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서울살이의 경제적 비용으로 반대하셨으므로 그것만 내가 해결하면 될 터였다.
서울로 오자마자 가능한 시간과 거리 안에 있는 아르바이트를 모두 했다. 다행히 내겐 너무나도 즐거운 일들이었다. 지금도 다시 하고 싶을 정도로.
그중 나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주수입원은 과외였지만, 영화 엑스트라, 방송국 방청객, 바텐더 보조, 레스토랑, 카페, 편의점 등 닥치는 대로 했다.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며칠 일하다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았고, 절대 그렇게 그만두지 못하는성격의 나는 그러한 빈자리를 메우며 돈을 더 벌 수 있었다. 혹여 수업으로 불가피하게 그만두어야 할 때에도 수강신청 직후 알려 양해를 구했으니, 수많은 아르바이트의 마지막은 늘 애틋하고 따스했다.
그렇게 잘 마무리해 둔인연들은 시간이 한참이 지난 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기도 했고 또 다른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더라.그 넓고 넓어 보이는 서울도 그저 조그마한 곳일 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인연들과 마주할 때마다 신기했다.
돈이 필요해서 한 일들이었지만 그 돈의 가치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특히 인연의 끝맺음의 중요성을,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는 인연들에 대해 깊게 알게 된 시간들이었다.
직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종일민원인 분들을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된 날을기억한다. 어느 부부가 어떤 경찰관의 명함을 들고서는 나를 신고를 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제정된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 불과하기에 일정한 법적 요건에 해당하는 것을 자유로이내 마음대로부릴 수가 없다.
장기 체납으로 여러 차례 예고를 해둔 터였고 신용카드 압류로 달려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고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어려운 경제상황에 소액이라도 분납하길 요청하며 기다렸던 터인데 더 이상 내게도 여지가 없던 상황이었다.
너무나도 흥분한 상태로 비난과 위협적인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니 나의 말들은 감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모든 말들과 분노가 다 쏟아내어 질 때까지 듣고 기다렸다. 조금씩 그들도 지쳐 보였고 물을 가져다 드렸다. 천천히 처음부터 설명해 드리다흥분하시면 다시 기다리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일하러 갈 시간이라며 돌아가셨다.
몇 개월 뒤 우연히 길을 걷다 누군가가 달려와 내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곧장 두 손을 덥석 잡고 활짝 웃으며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그 부부 중 한 분이었다. 그때 본인이 너무 심하게 해서 미안하다며따스하게 안아주었다.
그래, 그날 나는 무척 화가 나고 슬펐다. 내가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비난과 욕설들을 오랜 시간 듣고 있자니, 이것이 나의 일상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고 무한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쏟아지는 화를 안아내고 그 속에 이해를 불어넣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따스하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를보며, 그날 내가 노력했던 그들과의 마지막 시간은분명 헛되지는않았던 거라고생각했다.생채기가 났던 기억이 조금은 치유된 기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끝인 듯끝이 나지 않는 인연의 끝맺음,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직렬은 다르지만 공무원 시험을 함께 준비하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우리 둘 모두 지독히도 가난했기에 데이트라고 해봤자 공공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고, 생일이면 좋아 보이는 싸구려 레스토랑에 가서 피자를 먹었다. 그랬기에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과 응원하는마음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덜컥 나만 합격해 버렸고, 며칠 뒤 그는그 싸구려 피자를 사주고는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집이 갑자기 부도가 나서... 합격하지 못한 본인은 내게 부담이 되기 싫다... 는 여차저차한 이유가 있었지만, 내겐 그저 이별통보였다.
사실 그땐 그저 나와 헤어지기 위한 거짓말이라 생각했고 몹시 화가 났지만,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기에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따스한 말을 건네며 고이 이별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별은 슬프고 힘들었고,무엇보다 이 상황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렇게 2년이 지났을까, 내 생일에 그로부터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그것도 수개월 뒤에 알았지만. 그것은긴 글의 안부 섞인 생일 축하 메일이었다. 아직도 집안의 상황이 해결되지 못하였으며 그때 이별을 통보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본인의 상황을 보아서는 그렇게 하길 잘한 일이라며 힘들 때마다 산에 올라 나의 안녕을 빌곤 한다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이별통보로 힘들었던 나의 시간 뒤에 아마도 더 힘들었을지도 모를 그의 시간이 겹쳐지며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때그를 향한 원망의 마음을 접어두고 고이 이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인연의 아름다운 맺음은 그 이전의 기억들마저도 곱게감싸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직장과의 이별도 그러고만 싶었다. 고운 마음으로 아름답게 이별하고 싶었다. 어찌 됐건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젊은 날들을 다 바쳐 꿈을 안고 최선을 다했던 곳. 하지만 숨 쉬는 일에 허덕이며 도망쳐 나온 그곳과 나는아름답게 이별하지 못했고그렇게 난 여전히이별하는 중이다.
생애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어여쁜 추억들이 많다면 웃으며 후회 없이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별것 아닌 것 같은 아름다운 마지막들이 모여 내 인생의 찬란함을 만들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보잘것없는 끝맺음 말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끝맺음, 그렇기에 언제나 마지막엔 소홀해지고 싶지 않다. 시작하는 마음만큼이나 용기 있고 설레는 마음이길 바란다.
그렇기에나는 그곳에서 날들을 오늘도곱씹고 다듬어 아름답게 이별하기 위해 마음 다해 노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