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 Oct 07. 2021

이기적이라는 말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살았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동생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채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엄마는 나이가 60이 다 되도록 투잡을 유지했다. 우리에게는 본인의 앞가림을 잘하는 것이 가족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었다.


 내가 해외 생활을 시작한 후 엄마는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한 적도,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안부 메시지도 항상 내가 먼저였다. 엄마는 나의 연락을 기다리는 편이었다. 자신의 연락이 딸에게 방해는 되지 않을까, 내가 전화를 자주 하면 국제 전화비가 많이 들지 않을까 걱정했겠지.

 나는 내가 내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하고, 내가 귀찮으면 몇 주씩이라도 연락하지 않았다.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냐는 말에 '해외에서는 카톡 잘 안 해서 잘 못 봐'라고 변명하고는 했다. 나는 한 달에 200분씩은 한국으로 무료 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굳이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던 그런 딸이다.


 엄마가 카카오톡 전화도 아니고, 내 호주 번호로 직접 전화를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나는 그때 플랫폼에서 시티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리야. 엄마 번호로 전화 좀 줄 수 있어?"


 나는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엄마는 결론부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일단 아빠는 살았어."


일단 살았다니. 생사가 달렸던 사고였다니. 나는 말을 잃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빠가 술에 취해 밤길을 헤매다가 차에 치였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여서 크게 부딪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끔찍한 사고였다. 어깨, 가슴, 갈비뼈, 골반, 팔, 다리 등 11곳의 골절, 이미 아빠는 이미 두 번의 큰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아빠는 4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겨우 오늘 깨어났다.


 어릴 때는 아빠가 빨리 알코올 중독에서 나았으면 했다. 조금 자라니 그건 현실 불가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빠가 차라리 없었으면 했다. 철이 없던 시절, 아빠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주 가끔은 차라리 죽었으면으로 바뀌었던 것을 속이고 싶지는 않다. 독립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아빠가 진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닥치니 나는 이 모든 것이 철없던 시절 나의 기도 때문이었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왠지 모를 분노로 바뀌었고 엄마에게 크게 화를 내고야 말았다.


"왜 말 안 해줬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바로 말해줬어야지. 아빠가 4일이나 생사를 넘는 기로에 있었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나는 가족도 아니야? 아빠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럼 아빠 가는 길도 못 볼 뻔했잖아!!"

"..." 엄마는 아무 말도 않았다.

"정말 지긋지긋해. 아빠는 또 술에 취해 있었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사단이 한 번은 날 줄 알았다고!!"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엄마가 말했다.


"그 정도만 해. 너는 네 생각만 하니? 미안하지만, 내 남편이 죽어가는데 너한테까지 전화하고 자시고 할 시간 없었어."      

 

 내가 쏜 화살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가슴을 찌르는 기분. 내가 이기적이라는 엄마의 말이 나의 입을 다물게 했다. 분했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매우 서운했다. 내가 엄마한테 한 모진 말들은 생각도 못하고. 


 나는 그때 원래 일하던 곳보다 훨씬 좋은 곳에 취직해서, 미국에서 있을 2주간의 트레이닝을 앞두고 있었다. 새 직장을 구한 것과 며칠 앞둔 미국으로의 첫 방문에 한참 들떠 있었던 시기이다.

 엄마는 나와 아빠가 닮은 구석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인내심이 살얼음처럼 얇고 충동적이라는 것. 아빠가 사고가 났고, 생사를 넘나 든다는 소식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아마 충동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때 사고 마음의 장애에 더불어 몸도 불편해졌다. 알코올 중독으로 원래도 직업적 활동을 잘 못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아예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아빠는 살았고, 나는 결과적으로 아빠가 혼수상태였을 동안 나에게 아빠의 사고를 알려주지 않았던 엄마에게 고맙다. 만약 내가 그때 한국으로 날아갔다면 나는 또 다른 이유를 지어내 아빠를 원망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끝까지 이기적이다.

이전 12화 어떤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