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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05. 2021

오해를 오해로 두기

 나는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대학생 때 친구가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대학생 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때 사귄 인연들은 진짜 나를 모른다.


 나는 수능이 끝난 이후로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시작한 대형 횟집 아르바이트에서, 넥타이를 두른 아빠 나이 정도의 꼰대가 스끼다시를 상에 올리고 있는 나의 종아리를 더듬으며 팁이라며 건네던 만원 짜리를 어쩌지 못하고 앞치마에 욱여넣으며 '아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구나. 가 진짜 세상에 던져졌구나'했다. 그 후로도 커피숍, 프렌치 레스토랑, 영화관까지 참 다양한 곳에서 쉬지 않고 일했다. 누구에게는 아르바이트가 용돈 벌이를 위한 선택사항이었겠지만 나에게는 필수 사항이었다. 내 등록금과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 외에도 새벽에는 엄마를 도와 신문 배달을 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비록 정시로 겨우 들어간 서울 턱 끝에 붙어있는 4년제 대학이지만 장학금을 놓친 적은 단 한 번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네임밸류가 낮은 대학에 간 게 다행이다. 잘 나가는 대학에 붙었다면 나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들 사이에서 장학금은커녕 졸업조차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나는 소위 '과탑'이었는데, 내가 이렇게 과탑에 목메는 이유도 단 하나, 학과 1등이면 학비의 50퍼센트를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2등도 싫었다. 2등을 하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은 학비의 30프로 줄었다. 장학금을 타내는 것도 나의 필수 사항이었다. 덕분에 나는 최우수 논문상을 받고 가을학기 과수석으로 졸업했다. 비록 서울 턱 끝에 붙어있는 대학이지만.


 그렇다고 친목 활동에 소홀히 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제일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싸도 아니었다. 나는 학과의 오락부장이었다. 학생회 활동과 학내 친목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대학교 오티고 엠티고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교수님과도 은사님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적당하게 촉망받는 적당하게 긍정적인 사이였다. 씨씨였던 남자 친구도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 내내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평범해 보이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 그때의 나는 매일이 고단했다. 정말로 고단했다. 독한 년. 

 이러한 사정을 당연히 몰랐던 한 대학 선배는 '겉으로는 보기 에는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좋으며,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내가 우쭐하다했다. 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며 재수가 없다' 했다. 내가 전공 수업 노트 필기를 공유하지 않아서였을거다. 

 내가 속으로는 얼마나 자존심이 낮은 쭈글이인 줄도 모르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안 그래도 쭈그러져있는 마음이 더 쭈그러 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어쩐지 모르게 어깨를 펴고 싶었다. 평범하게 보이고 싶었던 내 계획이 어찌 되었든 성공한 거 아닌가? 굳이 '선배, 저는 백조예요. 겉으로 보이게는 멀쩡하지만 물속에서는 살기 위해 파닥거리는 백조라고요.'라고 자기 고백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더 어깨를 펴고 걸었다. 그냥 나를 오해하게 놓아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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