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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06. 2021

어떤 아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아빠와 나의 관계를 숨기는 것은 더욱 어렵다. 온 친척이 모이는 명절, 결혼식이나 친지의 장례식 등에 참석했을 때 아빠에게 데면데면 구는 나를 보고 가족들은 이렇게 말했다.


"니가 아빠한테 그럼 안되지. 너희 아빠가 너를 얼마나 이뻐했는데."


 내 전 남자 친구는 불의의 사고로 아빠를 잃었다. 내가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너는 그래도 아빠라도 있잖아. 너 그러다 나중에 후회해. 아빠한테 잘 해 드려."


나는 이런 말들을 정말 싫어했다. 그들의 얄팍한 면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당신의 완벽한 이해는 바라지 않으니 나의 감정까지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다는 소식에 서울에서 엄마의 친정이 있는 양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왔던 아빠.


양수 물에 잔뜩 불어있어 쭈글거리던 나의 손가락 발가락을 세고 또 세며, 손가락 발가락이 길어 크면 키도 크고 미스코리아가 될 거라고 했던 아빠.


당신 친구를 만나러 갈 때마다 혼자 어깨띠에 나를 메고 나가 친구들에게 나를 자랑하던 아빠.  


내가 엄마와 시장을 가다 넘어져 이마를 다섯 바늘 꿰매게 되었을 때, '네가 감히 내 딸을 다치게 했다'며 엄마의 뺨을 갈겼던 아빠.


엄마가 내 손을 놓쳐 잠깐 나를 잃어버렸다가 찾았을 때 나를 뺏어 안으며 엄마에게 당장 이혼을 요구했던 아빠.


초등학교 입학 전 날 내 가방과 노트에 반듯하게 내 이름 석자를 적어주던 아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태국으로의 가족 해외여행 때 원숭이를 무서워하던 나를, 하루 종일 안고 다녔다던 아빠.


 이 모든 아빠의 모습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아빠가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에 의존해 묘사되거나, 내 기억 저 깊은 곳에 숨어 거의 잊힌 아빠의 모습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거나 또는 희미하게 내 어딘가에 잔존하는 아빠의 모습 때문에 나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에게 을 진 것처럼 잘 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그들은 나에게 아빠가 어떤 아빠였는지 모른다.


매일 글라스 가득 담긴 소주 한 컵으로 아침을 시작하던 아빠.


착한 시골 처녀였던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살게 한 아빠.


술을 사기 위해 딸의 지갑을 훔치던 아빠.


금단 현상으로 이상한 망상에 빠져 밤새 가족들을 잠 한숨도 못 자게 했던 아빠.   


술을 못 마시게 하는 엄마를 떼내기 위해 소주병으로 엄마의 머리를 내려치던 아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주변 물건을 다 때려 부시던 아빠.


칼로 가족을 위협하던 아빠.


집 앞 슈퍼에 매일 외상 지던 아빠. 외상이 안되면 술을 훔쳐서라도 마시던 아빠.


없는 살림에 세 번이나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에 입원시켰지만, 퇴원 길에 술을 사 집으로 들어오던 아빠.


이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아빠다.


 나는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가만히 눈을 감고 다정한 아빠를 상상해본다. 나의 잠재의식 저 깊숙이 숨어있는 아빠를 끄집어 내보려 노력한다. 없었던 일이 아니다. 아빠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고, 나도 아빠와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 아빠는 정말 나를 사랑했다.

 눈을 떠보니 술에 취해 새우처럼 쪼그려 잠들어 있다. 이불도 없이 쪼그려 자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서글픈 마음이 든다. 아빠는 결국 나에게 어떤 아빠로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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