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당신이 알코올 의존증을 겪고 있는 사람과 가까이하고 있다면 염두에 두자. 당신이 그들을 사려야 할 때는 그들이 만취 상태일 때가 아니라 오히려 술에 취해 있지 않을 때라는 것을.
아빠가 보름 내리 술을 마시다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던 때다. 술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다 보면 몸이 더 이상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온다. 뇌는 계속 술을 마시라고 명령하지만 위와 간은 더 이상은 힘들다며 백기를 든 상태. 이 때는 술을 입에 털자마자 바로 거꾸로 올라오기 때문에 알코올 의존 20년 차인 아빠라도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 그간 몸이 말도 못 하게 상한 것은 물론이고, 금단 현상으로 아빠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있을 때 가족에게 어떠한 과오를 저질렀는지 술이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한다. 몇 일간의 씨름으로 나의 정신은 너덜너덜해져 있는 반면 본인은 술해 취해 있었을 때의 기억이 통편집이 되었으니 나만 미쳐버릴 따름이었다. 나는 그 점이 가장 버거웠다. 상처의 가해자는 이미 아빠의 깊숙한 곳에서 자취를 감춰버려서 상처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온전히 상처 받는 사람만 감당해야 하는 상처.
나는 당시 고3이었다. 여느 고3들과 다름없이,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10시까지 학교에서 그리고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보내고 집에 도착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저 따뜻한 이불 안에 들어가 편하게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빠는 술에 취해 있을 때 주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자신이 잠을 잘 수 없으면, 주변 사람이 잠을 자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알코올에게 잠식당한 아빠는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너무 괴로웠던 나는 차에서 자는 쪽을 택했다. 이미 며칠을 차에서 쪽잠을 자며 밤을 보낸 터라 나도 나대로 예민했다.
그래서 그날은 아빠에게 반항했다. 잘못한 사람은 아빠인데 꼭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해."
아빠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기운 빠진 아빠를 상대하는 것은 나에게는 기회라고 착각했고 나는 멈추지 않고 힐난했다.
"그래도 죽고 싶진 않은가 보지, 밥이 입에 넘아가게."
모진 말이다. 이 날카로운 말이 끝나기도 잠시, 아빠는 밥그릇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지금 내가 맞은 건가?' 그다지 아픔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목 뒤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아빠는 크게 놀라며 나를 부축했다. 아빠는 횡설수설하면서 며칠 동안 갈아입지 않아 노랗게 찌든 난닝구로 내 목 뒤를 닦았다. 자신이 딸을 다치게 했다는 것에 놀란 건지, 피를 보아 놀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놀라 하는 아빠에게 놀랐다. '아, 제정신인 아빠랑 싸우는 건 처음인 거구나, 아 제정신으로도 딸을 때릴 수 있다니 참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미 현실성을 잃은 나는 생각의 회로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119를 불러야 하나? 아니 집 앞 병원으로 가면 되나?'
그러던 찰나 엄마가 마치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한 번에 상황 파악을 하고 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재빠르게 막았다. 그리고 슬픔이 가득 찬 눈으로 아빠를 흘기고 병원으로 달렸다. 태어나서 응급실은 처음이었는데, 엄마의 부축을 받고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대인기피증이 있었던 아빠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망상을 하고는 했다. 그때 아빠의 기분이 나와 같았을까? 나는 누가 봐도 가정폭력의 희생양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지레 걱정이 되었다.
지금도 내 뒤통수 어딘가에는 작은 흉이 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닌 흉. 세월이 흘러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절대 없어질 수는 없는 흉. 잊은 듯이 살아가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그런 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