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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과 수양에 관한 단상

사람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by 김지향

사람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고대 동양철학은 이 물음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선(善)을 지향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달려간다는 예시를 들며, 그는 인간에게는 타고난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이 확장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네 가지 덕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착하고, 다만 그 착함을 잘 키워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순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며, 쾌락을 추구하고 욕망을

좇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성악설(性惡說)’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욕망(慾)과 이기심(利)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질서나 도덕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법도(法度)와 예절(禮儀)로 이를 억제하고 가르쳐야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순자에게 있어서

교육과 규범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또 하나의 관점이 등장한다. 바로 고자(告子)가 말한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처음부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본다. 마치 물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흐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선(善)으로도, 악(惡)으로도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중립적인 상태로 보는 점에서

맹자나 순자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다.


나는 사람의 본성은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다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성과 기질, 혹은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선한 면이 7할쯤 되는 반면, 또 어떤 이는 그 반대로 탐욕과 분노, 자기중심적 기질이 더욱 짙은 7할쯤을 차지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일정하지 않으며

사람마다 고유한 ‘본성의 무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이 본성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본성이 성장 과정 속에서 얼마나 수양되고 조절되었느냐이다. 교육, 환경, 만나는 사람들, 책, 경험… 이 모든 것들이 본성을 다듬고 빛을 입히는 요소들이다. 아무리 선한 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를 계발하지 않으면 결국 무기력하게

사라질 수 있다. 반대로, 설령 악한 본성으로 태어났더라도 끊임없는 배움과 수양을 통해 그 사람은 얼마든지 따뜻하고 성숙한 존재로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물려받은 본성에 갇히기보다, 그 본성을

다스리고 이끌 수 있는 노력의 방향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배움은 결코 늦지 않다.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나아가는 모든 과정이 곧 인간다움을 회복해 가는 여정이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결국 인간의 본성은 고정된 틀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그 과정에는 늘 선택이 따른다.

어떤 무늬로 빚어질 것인가. 어떤 색으로 채워질 것인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내리는 작은 선택들이 모여,

그 사람의 본성이 된다.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다.

다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선’이 되기 위해 애쓰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배우고 익히며, 스스로를 더 따뜻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빚어가는 여정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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