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는데.
아씨 오늘이었나. 미처 체크하지도 않았고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싸늘하다. 기억을 더듬어 며칠 전 슬쩍 보았던 캘린더를 떠올린다. 왠지 오늘이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 지금 밖인데 이러면 어떡하냔 말인가. 어쩐지 기분도 제멋대로에 짜증 투성이었고 온몸을 짜릿하게 해주는 단 음식도 너무 땡긴다 했다.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무거운 발걸음, 중력이 씨게 잡아 땡겨서 땅으로 꺼져버릴 듯한 늘어짐, 그리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하품까지.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던게다.
사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해 불편한 서프라이즈를 당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편의점으로 향했다. 쭈뼛쭈뼛 그쪽 코너로 가 하나 집어 들고선 계산대 위에 살포시 올려둔다.
"계산해 주세요.."
"봉투 필요하신가요?"
"네, 주세요. 안 보이는 걸로요."
편의점 알바생과 데면데면하듯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결제를 무사히 마친다. 근처 화장실로 향하는 중 점점 아파온다. 알싸하고도 묵직한 이 불쾌한 느낌. 조금만 기다려주지, 내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도 간청했거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늘도 내 소원 따위는 이뤄주시질 않았다. 서운해요 정말.
무릎부터 뒷골까지 서늘하고 시린 이 알다가도 모를 통증은 매번 신통방통하다. 놀라우리만치 끔찍하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순 없으나, 조금 규칙적인 섭리라면 좋았을텐데 또 지멋대로다. 오늘은 꽤나 긴박한 지령이었는지 준비도 안된 내게 이런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다니. 가지고 다니던 액상 진통제도 챙기지 못했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정말 망했는데. 오늘도 예고 없이 전쟁통에 내버려진 나는 고군분투했으나 치열한 혈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첫 문장 출처: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