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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Nov 27. 2024

EP5. 열여섯의 성적표는 30점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

뻔하긴 해도 잊을만하면 누군가 묻는 말.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나요?'


답변의 내용을 새로 각색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열여섯 살인 '나',

중학교 3학년인 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해 봄, 아버지가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여전히 그리워하는 걸 보면

애틋한 부녀지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전혀 아니었다.


나와 동생에게 늘 엄하셨고,

엄마에게도 매우 다정한 남편은 아니었다.


큰 병 앞에서도 습관은 쉽게 고쳐질 리 없었고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돌보며 나를 챙겨야 했음은 물론,

가끔은 찾아오는 분노와 우울함과 싸워야 했다.


대중없이 번번이 패배했다.


사고처럼 다가온

시련의 끝이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며

끝없이 터널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췌장암 말기'라는 질병에 

남은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항암치료는 고사하고 통증 관리만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전실했다.




4월, 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많이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대개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무뚝뚝하고 엄하셨던 아버지 딴에는 사랑의 표현이었겠지만,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의심이

확신이 된 탓에 이후로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한 나'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는 가늠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고,

더 이상 온전한 대화를 나누기 힘들어졌다.


미웠던 것인지 슬펐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이 흐릿해져 복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순간.


너무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체온을 잃은 아빠를 느끼면 무너질 것 같아

그저 사랑한다고,

이제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만 전했다.


따뜻하고 큰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렸는데

결국 내가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놓아야 하는 상황.


그렇게 가족의 삶에서 아버지를 지워갔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후회 없는 4개월을 보낼 수 있을까?


정말 자신 없다. 


그때가 아닌 다른 어떤 순간에서든지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간신히 버텨왔고

선택한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그럼에도 결과가 30점이었다면,

그것이 그 시절 내게 허락된 만점이었을 것이다.


내가 30점짜리 성적표를 얻을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에서 내가 머뭇거리지 않고 살아냈기 때문이다.

20점, 10점, 혹은 0점이 아님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눈물지으며 구겨 던졌던 성적표는

실패의 경험이 아니라, 노력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조금 더 명확히 말하자면

그 시절의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갈 자신이 없다.




아빠가 떠나기 전,

병동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불러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저 아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물론 감당할 없는 슬픔에 힘들겠지만

두 분이 어떻게 노력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해 주길 바라요.” 


나는 고통을 덜어드릴 수도 없고,

애써도 달라질 것은 없기에

내 존재 역시 큰 의미가 없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당시 수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은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작은 몸부림과도 같은 노력이

그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감싸안는 위로였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 

누군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는 다짐.


병원을 떠났어도

여전히 그 다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간혹 프리랜서의 삶이 불안정하고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엔 부족하게만 느껴져

내가 그저 '싫은 것을 피하려는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결론은 늘 같다.

아마 앞으로도 완벽한 선택은 없을 것이라고. 


숱한 두려움과 불안, 혹은 의문이 속에서

후회를 찾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역시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앞으로도 100점짜리 성적표를 볼 수 없더라도

나는 그저 내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지.


혹여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를 다시 만나면,

이렇게 말해야지.

 

"너는 이미 잘하고 있어.

비록 지금은 끝없는 실패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선택이 언젠가 너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거야." 


나는 그때의 나를 믿으며 지금의 나를 살아가고 있다.


최선을 다해 그때를 살아냈던 나를 대견히 여기며, 존중하며.

그렇게 살아내야지.


올해, 서른셋의 성적표는 99점이라고 해두자.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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