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0일
유튜브 영상 시청하다 6.25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모습이 컬러화되어 업로드된 것을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그 머나먼 옛날에 우리네 할아버지들께서 악전고투와 목숨 바쳐가면서 희생하여 우리가 그래도 반쪽짜리 땅에서라도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험악한 시대에 젊은 청춘을 바쳤을지 유추해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쓰럽고 불운을 가득 짊어진 세대가 현재 80세가 훌쩍 넘은 어르신 세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극적인 전쟁으로 인하여 배움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어디가 아파도 의료 기술마저 열악하다 못해 의약품 조차도 없던 시절에 어린 시절과 젊음을 살아야 했던 세대 그래서 내 마음이 애달파서 힘들었다.
부모 형제 모두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모 형제는 있어도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왔을 사람들이라고 알게 되니 이 마음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 4월 000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가 같이 참배했던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공원. 이곳엔 한국 민간인들로 구성된 지게부대원들이 탄약을 운반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한국노무단(KSC·Korea Service Corps)이지만 지게 모양이 알파벳 A를 닮았다며 미군은 'A프레임 부대'(A Frame Army)라 부르기도 했다.
6·25 당시 연인원 30만 명이 투입된 지게부대원 중 2천64명이 전사했다. 실종자는 2천448명, 부상자는 4천282명이나 됐다. 1950년 8월, 대한민국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8.3∼8.29)에서 하루 평균 50여 명의 지게부대원이 전사했다.
지게부대원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노무자들로, 군복을 받지 못해 무명옷 차림으로 최전방 전투지역에 식량과 탄약 등 군수품을 져 날랐다. 지게부대의 활약상에 미8군사령관이자 유엔군사령관인 밴 플리트 장군은 "만약 지게부대가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의 미군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했다"고 했다.
지게부대원들은 포탄과 식량을 40∼50㎏ 짊어지고 가파른 고지를 올랐다. 내려올 때는 부상병을 실어 날랐다. "허리를 굽히고 앞만 보고 걸어라"가 이들의 행동 수칙이었다. 전쟁의 참화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사명감에서 우러난 위국 헌신의 전범을 지게부대원들은 보여줬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동상과 전쟁 당시 국군을 지원한 지게부대원을 기리는 추모비가 들어선다. 오는 7월 5일 백 장군 3주기 추모식에서 백 장군 동상과 지게부대원 추모비 제막식이 열린다.
지게부대원 추모비는 백 장군의 장녀 백남희 여사가 사비로 1천200만 원을 들여 제작한다. "아버지와 함께 싸운 지게부대원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었다"는 게 백 여사의 얘기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73년, 정전(停戰) 70년이 되는 해다. 북한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적화(赤化)됐을 것이고 우리는 북한 '김씨 왕조'의 착취와 압제에 신음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풍요는 지게부대원과 같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 매일신문
어제 늦은 밤 해피 빈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대상 유족 찾기 DNA 신청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혹시 해당하는 국방부에 사전 신청하면 실오라기 한 올이라도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까 싶어 가족 구성원에게 운을 떼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러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신 게 아니라 그 당시 대통령이 북한이 밀고 왔을 때 만일에 남자들이 징집될까 봐 옷도 신발도 먹을 것, 덮을 것도 아무것도 없이 징집해서 행군만 오래도록 시켜서.... 그래서 돌아가셨어." "계급 있는 군인만 국민이고 우리 할아버지와 유가족은 잊힌 국민이야."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 근현대사 역사를 잘 찾아봐. 그 시대 대통령의 전신이 어떤 사람들인지....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이 중국군의 공세에 부닥쳐 1950년 11월 말부터 1951년 1월 사이에 서울 이남 지역까지 철수한 사건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발생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이 한국전쟁(6·25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 지역까지 퇴각한 사건을 가리킨다. ‘1·4 후퇴’라는 명칭은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한 1951년 1월 4일의 날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퇴각하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따라서 북한 지역에 살던 주민들도 대거 남한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난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했는데,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피난민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경과 원인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6월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하고,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며 남하하였다. 그러나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조직된 유엔군은 낙동강에 방어선를 치고 북한군의 남진을 막았으며,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의 배후를 차단했다. 그리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패퇴하는 북한군을 쫓아 10월 2일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 유역인 평안북도 초산에까지 이르렀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고, 10월 말에는 압록강 유역인 혜산진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에 쫓겨 패퇴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이 지원한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 끝에 승리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세운 중국공산당 정부는 북한의 패배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고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0월 19일 26만 명의 병력을 1차로 압록강 너머로 파병했으며, 10월 25일에는 펑더화이[彭德懷]를 총사령관으로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다.
유엔군의 퇴각
중국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1950년 10월 25일에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산지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은밀히 이동해 급습하는 전술을 사용해 평안북도 운산과 영변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유엔군은 중국군에 대한 총공세를 계획해 실행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1월 말부터 퇴각을 시작했다. 평안도 지역에 있던 유엔군은 11월 29일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물러난 뒤에 12월 4일에는 평양에서도 철수했다. 함경도 지역에 있던 유엔군도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공격하려던 장진호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월 14일부터 흥남에 집결해 해상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결국 1950년 12월 6일 평양이 다시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12월 말에는 북한군이 38선 지역까지 남하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3일 의정부 방어선이 뚫리자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 넘겨주고 물러났다. 북한군은 1월 7일 수원을 점령하며 남진을 계속했다.
유엔군의 반격
북한군과 중국군은 오산과 장호원, 제천, 삼척 등의 지역까지 남하했으나 겨울철의 추위와 식량 부족 등의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전열을 정비한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큰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은 1월 9일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해 원주를 점령했다. 1월 15일에는 오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월 28일에는 횡성까지 진출했다.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부닥친 북한군과 중국군은 2월 7일부터 퇴각하기 시작했고, 유엔군은 3월 14일 서울을 다시 되찾았다. 그리고 3월 24일 38선 이북 지역으로 진격해 5월 무렵에는 연천·평강·철원·김화·인제·고성 등지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부터 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양상으로 지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두피디아] 1. 4 후퇴
https://youtu.be/lTovOfS7IgE?si=tbt6zEB2IdjrGixt
https://youtu.be/342lAJ5XV7E?si=X45XJGvDYNRdwQly
고령 어르신이 된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은 "1950년 1·4후퇴 당시 추운 겨울이었어. 낙동강 어디로 고향마을에 살고 계신 어른 2명 합해서 세 명이 징집되어 나갔다고 더라. 지게 부대원 중 너희 할아버지는 그 당시 학식이 풍부하셨고 이름 석 자와 한문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시는 분이었지. 그곳에는 이름 모를 전염병이 돌고 돌았고 할아버지는 그 사람들을 간호해 주었다고 하더라. 2명은 건강 회복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오셨어. 그런데 어느 정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은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돌려보내지 않으셨어. 살아 돌아온 그 어른은 그곳의 이름과 위치도 쓸 줄 모르고 관심도 두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기에 어떤 근거도 모른다는 거야."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몇 번을 더 같이 다녀 온 사람을 만나고 왔지만, 헛수고만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1983년 KBS한국방송에서는 대대적인 이산가족 찾기 특집 생방송을 한다기에 작고하신 할머니와 아버지가 큰 대자보를 몇 장 써서 혹시나 해 며칠에 걸쳐 참여하였는데 수포가 되었다고 한다.
https://youtu.be/Nqe-GGDuBb8?si=az149PFAE_yDbxh5
어르신한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끝나지 않은 생이별이 상처로 남다 못해 옹이가 맺혀버렸고 우리 유가족 후손은 국가를 상대로 씻을 수 없는 원망으로 자리 잡았다. 어찌해서 000 정치인들과 통수권자를 뼛속 깊이 미워하는 이유가 이 가슴 속 깊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국회에서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꼬박꼬박 국민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의 월급은 잊지도 않고 잘도 받으면서 나라 지키라고 끌고 갔으면 책임은 져야 할 것 아닌가! 부어라 마셔라, 회식할! 비용은 어마어마 세금은 흥청망청 휘뚜루마뚜루 사용하면서 이런 일은 안중에 없단 말인가!
옛날이나 현재나 달라진 것은 일절 없다. 여전히 국민이 흘리고 있는 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내치기 일쑤인 자들이 어떤 색깔이 띄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투표소에 가서 어떤 누구를 위해서 투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당신들을 영원히 지우기로 했다. 당신들이 우리 할아버지를 잊은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당신들의 대대손손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울 것이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 정치 성향과 색깔에 상관없이 모두 통틀어서 해당한다. 그래~ 이것들아. 비나이다 0000에 영원히 빌어주마.
우리 유가족이야말로 국가에서 보상해 주고 유공자로 우대해 줘야 세상 이치에 맞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