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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인 Oct 24. 2024

돌아보면

물과 길, 그 교차로에서

 기차는 멈추어도 주인 잃은 레일 아래로 금호강은 여전히 흐른다. 수십 년을 함께한 회포가 있을 만도 한데 강은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철로 위를 달리던 기차는 보이지 않고 기찻길은 지난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자신을 찾는 사람을 맞는다.

  기찻길 위 전망대에 서면 일출을 볼 수 있다. 금호강 위로 불덩이 같은 해가 떠오른다.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햇빛이 용광로처럼 타오른다. 가만히 지켜보는 내 몸이 탈 것 같다. 해가 솟을수록 불쑥 다가오는 붉은빛으로 눈을 뜨기 힘이 든다. 어느 순간 불쑥 솟아오른 불덩이를 만난다.

  해가 떠오르자 건물의 검은 실루엣이 나타난다. 여러 갈래의 빛이 강물을 비추고 나의 얼굴에도 내린다. 강물은 고요히 금빛으로 물든다. 빛이 들지 않는 곳은 하늘색으로 나타나 금빛과 하늘색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강물이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자연이 그린 한 편의 그림을 마주한다.

  건너편 강가에서 낚시하는 아저씨는 긴 시간이 흘러도 낚싯대를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미끼도 바늘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간은 조용히 강물을 따라서 간다. 지나가는 시간은 언제나 조용히 간다. 그렇게 낚시꾼도 지켜보는 사람도 물길을 따라 살아간다.

  전국을 누비며 일하다 한쪽 구석에 박혀 쉬어야 할 때 기차는 마음이 편할까. 사람들은 아양 기찻길과 아양역에 그간의 이력을 적고 수고했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달리던 기차는 어느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매는지. 금호강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를 안고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길을 잃은 기찻길은 문학과 예술에 자신을 기댄다. 글을 적어 보여주고 사진을 내어 걸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마음이 허전한 사람에게는 한 잔의 차를 내어놓으며 달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유전자가 흐르는가 보다. 자신을 단장하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해 질 녘, 아양 기찻길은 생의 회한이 강물을 타고 밀려온다. 어릴 적 강물에서 물고기를 잡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만 혼자 강물 위에 섰다. 친구들은 기억이나 할까.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몸이 휘청거린다. 마음이 약해지면 몸도 따라가나 보다. 어쩌면 붉은빛의 강물에 포도주를 마신 양 몸은 벌써 젖어드는가. 강물처럼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본다. 크게 해 놓은 것도 없는데 흰 머리카락은 늘어난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보아도 금방 떠오르는 게 없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 경제적인 부도 학문적인 성과도 없이 남의 뒤를 따라가기에 허덕거린다. 그저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처럼 편하거나 낮은 곳으로 흐르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다가오는 시간을 주어진 대로 산다. 

  이제까지 버티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몸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 나도 흔적도 없이 밀려난 기차가 된다. 궤도에서 벗어난 삶은 달릴 수도 무엇을 바랄 수도 없고 뒷자리로 밀려나 지나간 시간만을 불러온다. 흐르는 물에 답을 구하지만, 강물은 그냥 흐르기만 한다. 잃어버릴 자신의 이름을 예감하며 그도 나처럼 물소리에 속마음을 감춘다.

  조금 더 가면 금호강도 이름을 잃고 낙동강에 섞여 흐른다. 자존심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이름마저 버리고 흐른다. 이름을 버리고도 처연하다. 생각해 보면 그깟 이름이 무슨 대수인가.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이름이 바뀌어도 여전히 금호강의 실체는 말없이 흐른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현재의 모습으로 말없이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내야 한다.

  아직은 뭔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은 있는데 세상의 여건은 만만하지 않다. 가끔 주어지는 작은 성과에 힘을 얻고 앞길에 뿌려진 작은 희망에 잠깐 미소 짓는다.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조각들을 맞추는 일이다. 몇 개 남지 않은 작은 조각들을 놓고도 때로는 희망을 꿈꾸지만 빨리 마무리를 하라는 시간의 독촉을 받는다. 허겁지겁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

  무생물인 기차와 기찻길도 멈춘다. 심지어 생명 있는 것은 오죽할까. 멈추거나 흐르더라도 자신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금호강이 이름을 잃어도 더 큰 무대에서 삶의 주류로 살아가리라 믿는다. 어쩌면 나도 물처럼 순환하며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이다. 늦은 시작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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