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규인 Oct 24. 2024

돌아보면

등대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새로 빌라 관리를 맡은 사람이 건 전화다. 퇴근하는 길에 택배로 온 신용카드를 찾아가라고 한다. 신용카드를 자신이 받지 않으려고 했다며 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 사람을 확인하고서야 카드를 건네준다. 책임 있는 행동이 믿음을 준다. 

  아들의 방을 정리한다. 침대를 내어놓기 위해 관리실에 가니 아저씨가 폐기 절차를 말한다. 리어카에 싣고 폐기물 모으는 곳으로 가는데, 언제 왔는지 기어코 손잡이를 뺐으며 끌고 간다. 처리비는 나중에 알려주면 내면 된다고 자세히 일러준다. 주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이 참 좋다.

  이번 여름 방학 기간 중 제주에서 살았다. 한 달 후에 마주한 아저씨는 그동안 모아 둔 우편물을 건네주며 제주살이가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 제주에서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이호테우해변의 말 등대가 떠오른다. 불빛이 있으나 없으나 안전한 항해를 돕는 등대의 모습이 아저씨의 모습과 겹친다. 

  아저씨의 근무지는 한 평 남짓한 관리실이다. 단순한 살림이 등대의 취향을 말하는지. 차를 마시는 커피포트에 늦은 시간 외로움을 달래줄 낡은 텔레비전과 추위를 녹일 난로가 전부다. 고단한 몸을 누일 자리도 없다.

  밤이 이슥한 시간, 관리실에 불을 밝힌다. 바람은 말없이 지나가고 가로등도 졸린 듯 눈을 비빈다. 별도 잠에 겨워 깜빡이는 밤에 홀로 밤을 지킨다. 바람마저 잠자리를 찾은 밤에 가로등이 비춘 두 눈이 반짝인다. 그를 보고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에 등대는 눈을 감으면 안 된다. 반짝이는 두 눈으로 빌라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새벽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서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아저씨가 밤새 이상이 없는지 빌라를 돌아다닌다. 천천히 걸으며 눈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바라보는 눈이 반짝인다. 눈길은 집으로 주차된 차로 시설물로 옮겨 간다. 나를 보고 대화하듯이 밤새 안녕한지 묻는다.

  빗자루질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부지런한 등대의 낙엽 쓸어 담는 손이 바쁘다. 매일 새벽 차가운 공기를 가른 손에 세월의 흔적이 쌓인다. 투박한 손에 낀 얇은 장갑이 바람을 막는다. 일하다 난롯불에 시린 손을 녹이고 다시 빗자루를 세운다.

  쓰레기 수거차가 오기 전에 쓰레기와 분리 수거물을 싣기 좋은 곳에 내어놓는다. 인적이 드문 새벽에 차가 오고 물건을 싣는다. 이어서 음식물 수거 차량도 오고 음식물 찌꺼기를 비워간다. 아저씨는 음식물 수거통에 묻은 찌꺼기를 물을 틀어서 씻어낸다. 빈 음식물 수거통에 아저씨의 따스한 손길이 채워지고 다시 자리를 잡는다. 

  모은 병을 종류별로 나눈다. 맥주병과 소주병을 빈 박스에 꽂아 넣는다. 나머지 잡병들은 분리수거통에 넣어 수거 준비를 한다. 병 속에 든 담배꽁초는 애를 먹인다. 거꾸로 흔들어도 잘 나오지 않는다. 한참을 씨름한 다음에야 꽁초를 꺼낸다. 밖으로 나온 꽁초가 멋쩍은 듯 한쪽 구석에 쪼그린다.

  외부 차량이 슬그머니 빌라에 주차한다. 아저씨는 얼른 뛰어나가며 출입구에 주차하면 차의 교행이 어려워 안전에 방해된다며 옮기라고 한다. 주차하려던 차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다시 관리실 안의 모니터를 보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차를 살핀다. 사소한 사고라도 나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이 매섭다.

  낮은 곳에서 삶을 비추는 사람들.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아저씨가 있기에 우리의 하루가 밝게 빛난다. 빛도 없는 이른 새벽에 출근할 때나, 해가 진 저녁에 퇴근할 때도 밝게 비춘다. 마음이 어두울 때도 밝은 웃음을 건네는 그가 있어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이 깨어난다.

  바닷가 등대는 높은 곳에 있다. 육지에서는 낮은 곳에서 암컷 반딧불이처럼 반짝인다. 그 반짝임이 사회의 밝은 빛에 가린다. 사회는 밝게 빛나는 불빛만을 기억한다. 한 모퉁이에서 약한 빛을 내기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바닥에서 약한 빛을 깜박거리며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낸다. 

  빛을 비추는 곳이 높고 낮은 것이 무슨 상관인가. 바닷가에 있건 육지에 있건 관계하지 않는다. 사람을 위한 마음만 가진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눈길과 손길이 어두운 곳을 헤매는 누군가를 향한다면. 오늘도 아저씨는 불을 밝힌다. 높고 낮은 것을,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조명등이 일제히 아래에서 위를 향해 비춘다. 위에서 누르듯이 비추지 않고 밑에서 다소곳하게 비춘다. 아래에서 위로 비추니 조형물이 더 돋보인다. 빛은 은은하고 아래쪽에 자리 잡아 눈에 걸리지 않는다. 도와주는 것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며 조용히 비추는 일이다. 등대는 늘 위를 쳐다보며 등대한다*. 

  등을 켠다. 사람들이 귀항하고 차도 정박한다. 한동안 북적이는 입항이 끝나면 등대 홀로 어두운 밤을 맞는다. 어두운 빌라 구석구석을 살피는 눈이다. 차가운 밤을 데우는 아저씨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밝게 빛난다.     

* 등대하다: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다.

이전 10화 돌아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