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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인 Oct 24. 2024

돌아보면

황혼역

  영남대역이다. 지하철에서 내린 학생들이 몰려나온다. 학교로 가거나 대구대학교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다. 두세 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기도 하고 혼자서 바쁜 걸음으로 간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몸놀림이 바쁘다. 

  학교 주변이 내가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많은 건물이 들어섰고 하는 일도 더 늘어났다. 학교 앞은 흔하던 막걸리를 파는 곳은 보이지 않고 커피와 파스타를 파는 가게로, 당구장이 인형 뽑기 가게로 바뀌었다. 시간은 이렇듯 말 못 하는 건물마저도 변하게 한다. 

  영남대역은 지하철 동쪽이다. 지하철은 서쪽 문양역을 향해 출발한다. 나만 가는 게 아니라, 기차도 시간도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이제 막 사회로 나가는 젊은 청춘들을 가득 태우고. 나이도 직업도 표정도 다른 사람들이 한 길을 간다. 그러는 동안 역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탄다. 

  반월당역에서 대학생들은 내린다. 중심가 반월당은 문화가 넘실거린다. 자신을 알리려는 무명 가수는 목이 터지라 부르고, 독특한 패션의 옷과 장신구는 젊은이를 유혹한다.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거닌다. 젊은 열기만큼 매운 먹거리와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즐길 거리로 가게는 사람들을 부른다. 땅 밑에서도 땅 위에서도 문화와 가게와 사람들로 반월당은 가득 찬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문화를 포식한다.

  반월당은 나이 든 어른에게는 추억의 장소다. 젊은 시절 그들도 영화관으로 막걸릿집으로 다니며 그들의 문화를 즐겼다. 젊은 시절 맛을 잊지 못하여 찾는 음식점만이 맛과 추억을 함께 즐기는 장소다. 그것마저도 젊은 사람들 때문에 설 자리를 잃고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다. 

  많은 사람이 반월당역이나 청라언덕역에 내려 다른 방향의 지하철이나 버스로 갈아탄다. 갈림길에서 서로 목적지가 다른 길을 걷는다. 어느 길이 더 짧거나 긴지도, 어둡거나 밝은지 모르고 간다. 지금 가야 할 일이 있고 그 길로 집이 있어서 갈아탈 뿐이다. 방향을 바꾸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누구도 모르지만 그렇게 간다. 

  문양역에 가까워지면서 노인들만 남는다. 젊은 시절의 화려함이 빠져 줄어든 작은 몸집과 앙상한 뼈대를 가진 사람들. 삶의 종착역에 다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흔들리며 일어선다. 물 한 병에 빵 한 조각이 든 주인 닮은 홀쭉한 가방을 챙긴다. 살아온 삶만큼이나 많은 계단은 허리가 꼿꼿한 노인들이 차지하고, 허리 굽은 사람들의 느슨한 줄이 엘리베이터에서 엘리베이터로 이어진다.

  삶의 종착역이 가까운 사람들. 가야 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찾기 힘들고, 흥미와 의욕을 잃고 몸무게마저 줄어든다. 묻는 말에 명확한 답을 못하고 주저한다. 밥맛은 떨어지고 잠마저 달아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막 한가운데를 맴돈다.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마음 언저리에 남는다. 

  공짜라서 지하철을 타고 나왔지만, 막상 나와보니 갈 곳이 없다. 오라는 곳도 없다. 의자에 주저앉는다. 마주 앉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본다. 혼자 남은 시간이 길다. 일할 거리가 없는 사람은 맥이 빠진다. 삶은 무료하고 매일 같은 일상으로 쉽게 달래어지지 않는다. 자주 만나는 사람을 사귀고 혼자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렇게라도 하면 조금은 위로가 된다.

  노인들은 영남대역으로 가지 않는다. 반월당역으로도 가지 않는다. 청춘을 지난 지 오래라서 새로운 문화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반월당역에 내려도 볼 일만 보고 돌아간다. 환승으로 삶을 바꿀 시간도 없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느리게 호흡을 맞추며 살아간다. 

  엘리베이터로 노인들이 몰려간다. 계단은 나이 든 사람에게는 고통을 준다. 덜거덕거리는 걸음으로 오르내리는 몸은 힘이 든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역사를 걸어도 몸짓은 고요하다. 느린 화면을 보는 것처럼 느리게 흐른다. 

  정자 아래에 몇 사람이 모여 파전을 시켜놓고 음료수를 나누어 마신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조용조용하다. 옆에는 둘이서 막걸리를 마시고 그 옆에는 혼자 앉아 바닥만을 내려다본다. 하나의 정자 안에도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시간도 사람에 맞게 가만가만 다가온다. 느낄 듯 말 듯 자신의 조건에 가장 맞는 방법으로 삶을 받아들인다.

  노인들의 뒤를 따라 마천산을 오른다. 입구에 걸린 현수막이 말한다. ‘잊혀 가는 기억을 찾아드립니다.’ 00 기억학교에서 배우면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노인들도 젊은 날에는 푸르고 눈부신 기억이 있다. 노인들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달랠 것이다. 

  종점은 다시 기점이 된다. 휴식을 취한 기차는 다시 영남대역을 향해 달린다.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는 양 기차는 다시 방향을 바꾼다. 기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다시 시작을 하지만 사람의 삶은 원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같은 일상만을 반복하고 시간의 변화를 몸에 새기다 쓰러질 뿐이다.

  서산 멀리 해가 진다. 노인들의 하루도 저물어간다. 무료한 하루를 달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들의 줄이 이어진다. 등에 황혼이 비춘다. 처지고 구부러진 등은 깊게 파인 주름 가득한 얼굴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삶의 이력을 온통 홀로 짊어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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