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규인 Oct 24. 2024

돌아보면

바람을 재우고 바람을 찾고

  퇴근하는 딸아이의 얼굴에 잿빛이 돈다. 나이가 많은 동료 여직원이 별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도 자꾸 싫은 소리를 한단다. 몇 날 며칠을 지켜보아도 회사에 까칠한 바람이 분다고 아이의 얼굴은 말한다. 그러한 시간이 길어지며 딸아이도 힘들어한다.

  일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때에도 딸아이는 날마다 일에 파묻혀 새벽이 되어야 핼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작업에 자신을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젊은 아이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그나마 자신을 지지해 주던 부장마저 사표를 내는 바람에 회사는 날마다 도살장이 되어 갔다. 우울한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르는 법이다. 아이는 날마다 회사의 싸늘한 바람을 맞고는 집으로 왔다. 파김치가 된 몸은 다음 날이면 다시 반복하여 시작하는 영화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제주도로 회사를 구해서 간 것은 그 일이 있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다. 수십 년을 함께 지낸 딸아이는 여행 가방에 짐을 챙겨 홀연히 떠난다. 딸아이가 떠난 빈방을 바라볼 때면 이제는 홀로 설 때도 되었다는 마음과 어떻게 잘 지낼지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두커니 빈방에 홀로 앉아서 가슴 밑바닥에서 자꾸만 올라오는 그리움을 홀로 달랜다. 

  방학을 맞아 딸아이의 집을 찾는다. 제주공항에 내려 전화하니 마중을 나온다. 제주의 세찬 바람과 함께 나타난 딸아이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난다. 그동안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무던히도 살아낸 삶의 흔적이 얼굴에 나타난다. 어쩌면 더 힘들었을 바다 너머의 삶을 아이는 이겨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다. 차에 타고 집으로 가는 시간 동안 딸아이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의 다음 질문이 꼬리를 문다. 

  아이의 집으로 가는 시간에도 차가운 1월의 제주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차를 따라온다. 추위를 잔뜩 먹은 제주의 바람은 어깨를 절로 움츠리게 만든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순간에도 매운 첫인사를 건넨다. 세찬 바람이 차갑기도 하다. 딸아이를 만나려는 부푼 마음마저 움츠리게 한다. 바람은 보란 듯이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며 윙윙거리며 주위를 서성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움츠린 몸은 딸아이의 둥지로 들어간다.

  아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주의 바다로 나가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을 맡긴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고 바람이 부는 대로 밀려간다. 제주의 바람은 가만히 있는 집안에서도 혼자 두지 않는다. 위잉잉, 세찬 소리로 아이를 불러낸다. 아이는 홀린 듯이 바람을 맞으러 다시 길을 나선다.

   얼굴을 향해 불어오는 세찬 바람인가 하면 어느새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을 맞는다.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자신을 맡기며 마음껏 자신을 내맡긴다. 바람에 묻어오는 비릿한 냄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하고 불어오는 대로 느끼고 행동한다. 제주 바람을 맞으며 딸아이는 조금씩 자신을 다듬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둥글게 뜨고 바라본다. 바람에 시간을 더하여 자신을 조각하는 아이의 모습을 애틋한 눈으로 지켜본다.

  딸아이의 얼굴에 동백꽃이 핀다. 탐스럽고도 소담스러운 웃음꽃이 핀다. 회사 사람들과 만남이 잦고 주말이면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사람들을 향해 나아간다. 안으로 숨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며 바람에 맞서는 모습이 대견하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바람은 늘 같은 방향으로 불지 않는다. 한때는 나를 막던 바람이 다른 때는 등 뒤에서 나를 밀어준다. 바람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자신의 길을 간다. 그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임을 제주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깨닫는다. 세상일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제주의 바람은 말한다.

 세찬 바람이 늘 불어오니 작은 바람은 일상이 된다. 이제는 웬만한 바람은 그냥 지나쳐야만 하는 하찮은 일이 된다. 그렇게 아이는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자신을 내려놓는다. 내려놓아 가벼워졌기에 바람을 타며 자신의 소중한 바람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자신에게 더 충실해야겠다고 작은 소망 하나를 바람에 띄운다.

  해변을 따라 홀로 떨어진 유채꽃 한 포기가 자란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꽃을 피운다. 가만히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자신만의 춤을 춘다.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리듬에 자신을 맞추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풀의 리듬에 맞추어 아이도 몸을 흔든다. 흐느적거리는 몸놀림이 바람을 탄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고 행동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세차게 불어오는 제주의 바람도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나를 밀어주는 든든한 지원자가 됨을 깨닫는다. 어떻게 생각하고 나아가는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사는 것은 수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마주하는 일이다. 때로는 바람에 몸을 휘청거리고 때로는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의 도움으로 쉽게 나아간다. 그렇게 크고 작은 바람을 마주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바람은 서로의 공기압 차이를 줄이려는 자연의 노력이 아닌가. 차이를 줄여 공평해지려는 자연의 몸부림임을 제주 바람은 말한다. 

  집으로 오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상승하는 바람 탓인지 비행기가 더 높이 오른다. 우리가 나아가는 저기 어디쯤 아이의 바람도 걸려 있을 터이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창밖만 바라본다.          

이전 11화 돌아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