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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Feb 28. 2024

우리 이제 자주 만나자고..

고모의 장례식

작은 고모가 돌아가셨다.

올해 연세가 여든셋.

내 기억에는 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를 볼 때마다 예뻐해 주셨던 그 모습만 남아 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소리일까?

소식을 받고 인천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입관이 진행되고 있었고, 서둘러 내려갔지만 이미 온몸이 단단히 동여매진 채 관으로 들어가실 차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얼굴도 뵙지 못하고 고모님을 떠나보내야 했다.

오열하는 누님과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눈물을 참고 있는 두 형님의 얼굴을 보았을 때, 마치 시간이 지워진 것만 같았다.


누님의 말로는 내가 어린 아기였을 때 많이 업고 다니며 놀아주었다고 한다.

누님과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집에 갈 때면 내가 모르게 몰래 도망치듯 하셨다고.

그리고 업고 다닐 때 오줌만 싼 것이 아니라 똥까지 쌌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님은 만날 때면 아직까지 내게 그 말씀을 하시면서 옛날을 추억하시곤 한다.

그런 누님이 서럽게 울며 엄마를 부르는 것을 보니,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나.

고모는 그렇게 서럽게 부르는 딸의 소리를 듣지 못하신다.

동여맨 베조각들이 얼마나 두껍다고.


초등학생 때 우리 동네에서는 야구와 축구를 자주 하곤 했다.

편을 나누는 기준은 거의 윗동네와 아랫동네였다.

아랫동네의 주장은 항상 작은 사촌 형이거나 형 밑에서 이인자 노릇을 하고 있던 형이 맡았다.

윗동네에 살고 있는 형 동생들과 친구들은 주로 상점을 하거나 번화한 곳에 살고 있는 부유한 집의 자녀들이었고, 아랫동네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주로 농사를 짓고 사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경기를 할 때면 항상 자존심을 건 불꽃 대결이 벌어지곤 했다.

아랫동네에 사는 형들은 잘 사는 동네 놈들의 콧대를 꺾어놓아야만 했고,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열등감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이기려 했다.


내 기억으로는 윗동네가 이긴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운동을 잘하는 형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랫동네가 항상 주눅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장 노릇을 하던 사촌 형은 자존심이 유달리 세서, 지는 것을 못 참아했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니, 동생들은 이겨야 된다는 압박감으로 항상 긴장해 있었다.

이인자 형은 사촌형에게 동생들 관리를 제대로 안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엎드려뻗친 채, 화풀이하듯 휘둘러대는 작대기에 맞으며 허벅지를 부여잡곤 했다.

그래도 나는 사촌 동생이라는 특권 때문인지 호사를 누리곤 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의 시각이 굴절되어 실제 현상과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렵게 살던 고모님 댁이 인천으로 이사를 가시면서, 어렸을 때의 행복한 추억들도 시간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촌 형들이 떠나가던 날, 나는 슬프기보다는 노여움을 느꼈다.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친척 모임을 중간중간 갖긴 했지만, 다들 바쁘게 사느라 흐지부지되고 오랜 시간이 흘러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전화번호를 서로 주고받는다.

이제는 서로 자주 연락하고 만나자고.

사는 게 바빠서 자주 못 만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오히려 바쁘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렇게 사는 것이 싫다.

바쁘게 살다 죽어 만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연재하고 있는 브런치북입니다.

⁕ 월, 목 - <문장의 힘!>

⁕ 화, 금 - <거장에게 듣는 지혜>

⁕ 수, 일 - <사소한 일상은 인생의 최종손익결산>


일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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