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관광지로 전락하거나 버려지는
문화유산

학사루, 건계정, 동계 고택, 수승대, 황산 마을, 모리재, 해인사

by 소중담

< 여행 열여덟째 날 >


새벽에 일어나 텐트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데, 편의점 주인아주머니가 파란색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누가 가져갔는지 혹시 보았느냐고 물으셨다. 공원 옆 화단에 매달아 놓았는데 그걸 누가 떼어 간 것이다. 하다 하다 쓰레기가 담긴 쓰레기봉투까지 가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동안 시민의식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 시민의식을 찾아보니

“시민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규범의식과 도덕의식을 이르는 철학 전문어”라고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의를 따르자면, 우리 사회는 아직 도덕과 규범에 대한 의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 몇몇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부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이지,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것 같지 않다. 하긴 뭐,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이라고 딱히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더라.


수승대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와서 그런지 실망이 컸다. 농월정을 능가하는 거대한 규모의 관광촌으로 변모해 있었다. 온통 숙박시설에 음식점, 위락시설로 가득 차 있었다. 거북바위에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퇴계의 시도 있다고 하는데 읽을 수가 없으니, 이렇게 답답할 수가. 명승을 제대로 즐기려면 한자부터 공부해야 하는 걸까?


CGoPr3meho39yVaS6tdoJw5FEH8H6YjeP9N2DYUGXFADgR5FKoelwLgUxrg3fPmFcgEN0dIxWFGus0q7z8JVbpZ4S6uAY68QOH2aj8VFIX50hzyDeikkmT_syAV8QHfOYjUWMl4Pts-ZWR8yacm0s60 수승대의 바위 벽면에는 퇴계 이황의 시, 갈천 임훈의 시, 요수 신권의 시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이름난 학자들의 시와, 25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0bGxXz5dbfm6P5uxRUGLYYJxYFCzNuzH07A5sFe0PT-G2_GI49SnjliTTiZ2zxmzp5NTFZwT4fftbFplP-Vmcn88XyheUf9-sKBuYMP70Fw8_3Kettfl654ihIVLNS339MbSFzgj48x0kSM4SfgVlwU 요수정은 신권이 풍류를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척수대 사이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805년 후손들이 현 위치에 재건립하였다고 한다


ihQscR8lKsF3H7x9olAYk-GOtNz5KSAFXpn_63b0WdYZu-W4GVtNb7nBc85MgznqIzTdSywetejRa_ZguWChzSOCVami3HjEuGay6Q83WSMRjQ9ys0a7OTw2aQ4rTE7DVUft_zpxqNyPF5xTkjim-68 요수정에서 바라본 경관





건계정은 과거 '송'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거창 장씨를 이루고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건계정은 송나라 때 고려로 귀화한 거창 장씨의 시조 충헌공 장종행의 후손들이, 선조를 기려서 1905년에 건립한 정자다. 외국인이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으로 아주 적었다. 대부분의 귀화인은 고려시대에 송, 원, 거란, 몽골, 위구르, 안남 사람들이었다. 귀화 동기는 망명, 표류, 투항, 왕실의 시종 등이었으며, 고려가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타까운 것은 동계 정온 선생의 ‘모리재’였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갔으나 매번 헛걸음만 했다. 우여곡절로 올바른 길을 찾았는데, 안내 팻말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잘못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기로 끝까지 간다고 산길을 올라갔는데, 마침내 길의 끝이 보이고 안내판이 보였다.


유홍준 교수님이 SUV를 타고 가라고 권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경차로 올라갔는데, 그 사실을 잊은 채 ‘이런 곳에 무슨 문화유산이 있다는 얘긴가’ 긴가민가하면서 올라갔다. 모리재의 누각에 올라 보니 말벌집이 두세 개 있어, 더 이상 머물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당의 문종이도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동안 관리되지 않는 문화재를 더러 보았지만, 이 같은 곳은 처음이었다.


Mx6Ze0ZM32u0dZdQdUfahPcCcpshrvH6gxp0vXukQk9b3UeC57c2S90xvTI0chSxN0f_L1_7zXaNHvljgBEHReEVAHzNXr2SkYS_OMqHSmtmwUeSBkIbi0qk1Pz-PiCS2NHht8o9jeJkXUPBvk3jvR4 건계정


SRtIqM2vDhLyby7P-o4cnhEAMIQ-Kmbo0zMv5iIuIIUw7E9Mfrc8hVuMehBYP9kDCbRbj91Smna4HaCVzu__utKEuHtR40-Jp3EksM5hPM1r4sFEON2t1jVWu6YS6pFK40s-Kez33nIZbvdjr6rWFFQ 모리재의 정문 화엽루


ko_uLSo6ZQBwHHQX2VmHW5j9leTxyH9NqadZjZAq-ahMHn1BZYmiX7TvoI0pcI6MFiyEcfKq6eS04W86kWhDZ1G_vRhrt7NggKzJgZ2cH2nj9eHfYQLpRy8q26w67lnXRWKMToapObLkE95r45CfURM 모리재의 본당 건물


20190804_120439.jpg 모리재 사당 건물


동계 정온 선생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척화파였다. 그러나 1637년 인조가 중국 청 태종 앞에 나가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고 화의가 성립되자,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전의(典醫)와 광주 목사의 손에 구명된 후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은거했는데, 유림들이 그를 기념하여 건립한 곳이 모리재다. 문화재청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유림들의 탐방 장소로 유명했다는데, 지금은 제대로 관리조차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인사는 다행히 팔만대장경을 구경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2021년 6월 19일부터 사전 예약을 통해 주말에는 건물 내부를 직접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대장경판을 온전히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은 건물의 구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장경판은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건물은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은 총 4동으로 옆으로 길쭉한 ‘ㅁ’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건물의 바닥에는 습도와 풍향을 측정하는 센서들이 늘어서 있고, 매시간마다 문화재청에 실시간으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가장 큰 두 동의 건물을 살펴보면, 동마다 한쪽 벽면과 반대쪽 벽면의 창문(살창) 구조가 다르다. 건물의 한쪽은 큰 창이 아래쪽, 작은 창이 위쪽에 있지만, 반대쪽은 작은 창이 아래쪽, 큰 창이 위쪽에 있다. 공기가 큰 창으로 몰려들어와 큰 창으로 몰려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아래로 몰려 들어온 공기가 나갈 때는 건물을 한번 훑은 후에 위쪽으로 몰려나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두 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공기의 순환을 만들어내고, 통풍과 환기, 적당한 습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_IibAvslHatNVfNw4xYog-MwnlMom1WT9RzUCGQd8-KWP8CY1hgQOCtYe_N3dauWbt4nQhKgytE4t69GlG2AwKcVoBszLO-C4hJpu_vGm1D-qMwnhlszYfd7_rVXT_sKOLWEiHma139mIe3tkFrOZRA


BrxyP8XWuaB7w6Y7nJFxzr1BoBpNLgPMCAzz9Q392TNLIk8FIsxDaCKSmboPn3imNcKb2irV8wEE5o-2wgfLY4jeoKmb7iJYVuyMN9r0aBlKR6Ph_teHCLH1E9SGaBlG_k8j8yQ7-oxi2CkTDZWAWbE 장경판전의 살창. 한쪽 건물 벽의 살창이 마주 보는 다른 건물 벽의 살창과 위아래가 바뀌어 있다. 그리고 건물 아래쪽에 통풍을 위한 환기 구멍이 뚫려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바닥에도 특별한 기술이 숨어있다. 바닥의 흙은 여러 가지 성분들을 혼합하여 만들어지는데, 여름에는 습기를 흡수하고, 건조할 때는 습기를 배출하도록 만들어졌다. 대장경판 자체에도 지혜가 담겨있다. 목재의 선별, 목재에서 습기를 제거하는 과정, 경판을 고정시키는 구조물 설치(마구리 작업)가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1251년 이후 지금까지 대장경판을 온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팔만대장경을 안내하는 분의 설명을 들어서는 잘 이해가 안 되어 인터넷을 뒤지며 공부했다. 직접 건물을 보니 훨씬 이해가 잘 되었다. 텐트를 친 곳은 ‘가야산 역사 신화 테마관’ 앞에 있는 잔디 주차장이다. 가야 호텔에서 사우나를 하고 텐트를 쳤는데,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너무 시원하고 쾌적하다.


G3g6HhijeijXugcr-vGL-euW4vmU2XjcdrMRzgD7hZZEkH_yOJrHfD0N80OY8j6QmDtOLUULZ5-mzQIpP6Q9MbUj5aSdIU5fBrdG0l2yeMuphvVnlSUrSFPdXLIvpdwxzjF8hVGtBf0qhsPnzvFFaDI

해인사에 들어가다 보면 ‘영지’를 볼 수 있는데, 전에 칠불사에서 보았던 영지와 내력이 비슷하다. 안내문을 보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 칠불봉으로 출가한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여 가야산을 찾았으나, 산에 오를 수 없어 아들들의 그림자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극진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러자 정진 중인 왕자들의 모습이 이 연못에 비쳤다고 전한다.”라고 되어 있다.


가만히 보면 사찰 중에 영지라는 동일한 명칭의 연못들이 있는데, 모두 ‘그림자 못’이라는 뜻이다. ‘실체를 만날 수 없으니 그림자만이라도’라는 것일까? 경주에도 영지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여기에도 전설이 얽혀 있다. 불국사를 지을 때, 아사달이 다보탑과 석가탑을 만들고 있었다. 아사녀는 아사달을 그리워하면서 기다렸는데, 기다리다 지쳐 호수에 비친 탑의 환영을 보고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뒤늦게 탑을 완성하고 돌아온 아사달이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자신도 못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전설이다. 이 이야기들을 보면 모두 애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데, ‘불도’를 이루기 위해 세상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 구도(求道)적 특성이, 이런 공통된 테마를 구성하는 듯하다.


rjTfqQ8zOvAXqevjvjlWfTN7SYZfvl-EkL8T_fcym1uJNv6630PD-5QotkIf7tt7zX5TbIMDfRxoAUbm1TOE8VLi04rWto8EZCkbG4U5fYcWBtdggp9sMh3wJFuFyN5dpfrbCNaSjOZmLFbb3btFAPQ 잔디 주차장에서 바라본 가야산 역사 신화 테마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