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연서원, 성주 성밖숲, 도동서원, 대가야 박물관, 양전동 암각화
전날 텐트 친 곳이 시원하고 편안하여 숙면을 했는지 몸이 가뿐하다. 처음으로 진드기를 보았다. 혹시 진드기가 더 있을지 몰라, 이부자리와 텐트를 탈탈 털고 청소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회연서원을 찾았다.
한강 정구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서원이었다. 문득 서원의 한쪽에 자그맣게 나 있는 예쁜 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아름다운 한옥 건물을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문은 처음 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특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점점 전통가옥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것 같다.
한강 정구 선생은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위에 퇴계(이황)와 남명학(조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문 계통을 세웠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서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유림들이 정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회연서원을 세웠고, 숙종 16년에 ‘회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4년 복원되었다.
성주 성밖숲은 때를 잘 맞춰 왔는지 정말 아름다웠다. 최소 수백 년을 살아온 ‘왕버들’ 수목들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덟 시쯤 된 것 같은데,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몰려들어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중 한 분께 말을 걸었더니, 사진에는 ‘주재(主材)’와 ‘부재(副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분들에게 ‘주재’는 꽃, ‘부재’는 나무와 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주재’는 나무(왕버들), 부재는 꽃, 사람은 ‘있으면 안 됨’이었다. 나에게 사람은 자연을 담아내는데 걸림돌밖에 안 되었지만, 그분들께는 자연환경과 어우러질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필수재’였던 것이다.
‘어우러짐’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는 어우러짐의 아름다움보다, 모난 것으로 인해 생기는 불화와 고통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나 보다. 나 역시 아름다움을 보고 싶으나, 현실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도동서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김굉필 선생을 생각하고, 서원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김굉필은 자신을 스스로 ‘소학 동자’라 부르며,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소학(小學)에만 정열을 쏟았다. 어렸을 때부터 호방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매질을 하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그만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게 되었고,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가 소학을 배우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소학에 매달렸다고 한다.
소학은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수양을 위한 격언들로, 주자는 ‘소학은 건물을 짓기 전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대학은 터 위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학은 인간 교육의 바탕으로 기본이 되는 것이다. 김굉필을 생각하면서,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기본을 갈고닦았던 그를, 사람들이 ‘도동’(도가 동쪽에서 왔다)이라는 이름으로 추모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간 교육의 방법이 오늘날에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돌과 흙과 기와, 그리고 수막새로 장식한 아름다운 담장을 보며 한옥의 멋을 다시금 느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처음으로 ‘화계’(꽃계단)를 보았다. 꽃이 만개했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강당의 기단에 장식된 용머리와 다람쥐 모양의 장식이 앙증맞으면서도 위엄 있게 보였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맨 위쪽 한가운데에는, 용인지 거북인지 모를 머리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는데, 왜 불편하게 한가운데에 만들어 놓았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아마 함부로 경솔하게 오르지 말고,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오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묘역에서는 어머니를 향한 딸의 효심과 가족의 사랑을 볼 수 있어 가슴 뭉클했다.
도동서원은 정면으로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비탈에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정문인 수월루부터 환주문, 강당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점점 상승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문화재청 설명을 보면 “1605년에 건립.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원의 특징을 대변한다.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서 낙동강을 바라보게 건물을 세운 건축 배치가 탁월하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가야 박물관은 월요일이라 휴관이었다. 나주 박물관도 그렇고, 광주 박물관도 그렇고 아쉬운 점이 많다.
마지막으로 고령 장기리 암각화를 보고 귀로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는 바람에 핑곗거리가 생겼다. 스마트폰의 인터넷 데이터 용량이 모자라 내비게이션을 사용했는데, 그만 말썽이 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도 역시 폭염의 날씨에 쉬지 않고 답사에 매달렸더니 조금은 지친 듯했다. 이참에 그동안 배운 것들을 정리하고, 다음 일정을 더 꼼꼼히 계획한 후, 2차 여행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언제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고 돌아갔을 때 나를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람을 커다란 바위나 성스러운 곳에 새긴 것을 말한다. 이 암각화의 바위면 규모는 높이 3m, 너비 6m가량이다. 암각화의 문양은 30여 점의 ‘돌칼 손잡이 형태의 문양’, 4점의 동심원 문양, 형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을 포함하여 약 50여 점이 있다고 한다. 검 손잡이 문양은 하늘의 비를 부른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농경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위한 상징물로 해석된다. 동심원은 주로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나, 물이나 빗방울의 모양으로 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이 암각화는 풍요와 다산, 그리고 농경에서 필수적인 비를 부르기 위한 제사 의례를 위한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내용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바위그림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 모양 등이 있는데, 동심원은 직경 18∼20㎝의 삼중 원으로 총 4개가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십자형은 가로 15㎝, 세로 12㎝의 불분명한 사각형 안에 그려져 있어 전(田)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표현한 듯하다. 가면 모양은 가로 22∼30㎝, 세로 20∼40㎝로 머리카락과 수염 같은 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안에 이목구비를 파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하다.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농경을 위해 태양신에게 소원을 빈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