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산성, 덕천서원, 대원사, 단속사터, 남명 조식 유적지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깼다. 새벽 4시.
따뜻한 이불을 꺼내어 덮고 잠을 청했지만, 한번 깬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을 뒤척이다 일어나, 동트기 전 하늘과 평사리 벌판을 바라보면서 해가 뜨길 기다렸다. 이슬이 내려 텐트가 축축해졌기 때문에 말려야 했다. 몰랐었는데, 옆쪽 위로 한산사라는 절이 있고, 그 아래 전망대 쪽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잔 것이었다.
잠자리를 다 정리한 후 고소산성에 올랐다. 대가야가 백제에 대항하여 섬진강 변에 쌓았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역사스페셜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백제에게 영산강을 빼앗기고 섬진강까지 빼앗긴 대가야가, 결국 신라에게 멸망당하는 약육강식의 역사를.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최참판댁에도 들러 보았다. 알고 봤더니, 지난밤 슬로시티 주차장에서 보았던 녹두전 제작팀들은, 어제 최참판댁에서 촬영을 마치고 쉬고 있던 거였다.
고소산성 안내판을 읽어 보면,
“일본서기는 고령의 대가야가 백제의 진출에 대비하면서 왜와의 교통을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다 한다. 신라 또는 백제의 축성으로 보자는 생각도 있으나, 현재까지의 자료에 따른다면 가야의 성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보면 ‘안내판 설명’과 함께 ‘문화재 설명’ 란을 따로 마련해놓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이다. 이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군사적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를 거쳐 왜군을 토벌하면서 남하했을 때 쌓은 고구려 계통의 성으로 보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이 통일되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되어 있다. 배경지식 없이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안내문의 내용을 좀 더 세심하게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동을 벗어나 산청으로 넘어왔다.
오는 내내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를 보았다. ‘경상좌도에는 퇴계, 경상우도엔 남명’이라는 말이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던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대원사로 향했다.
대원사로 가는 길목은 골짜기가 아름다워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원사가 비구니절이라는 것과 여순 사건으로 불에 탄 역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근현대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앓았던 절이었기에 가슴에 더 깊게 남았다.
동선이 꼬여서 단속사 터에 들른 후 남명 조식 유적지에 다시 와야 했다.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서울대 대학원에서 인문 기행을 온 팀들이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뜨겁게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미 한번 다 둘러보았지만, 자세히 들을 기회다 싶어 졸졸 따라다니며 해설을 들었다.
하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너무 추상적이고 일목요연하지 못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교수님과 학생들도 모두 그런 듯했다. 엘리트들 앞에서 16년간 닦은 기량을 한껏 펼칠 생각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하지만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네 시가 넘어 남사마을로 향했다. 가던 중 운이 좋게도 24시간 찜질방을 발견하고, 바로 들어와 씻고 식사를 하러 나갔다. 찜질방의 규모를 보아하니, 예전 같으면 무척이나 북적댔을 곳인데,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넓은 욕탕에서 낡은 샤워기로 혼자 샤워할 때 ‘귀곡산장’이 생각났다. 여기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 맞겠지? ^^;;
덕천서원은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내용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남명 조식은 명종과 선조에게 많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현실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중 ‘단성소’라 불리는 ‘을묘사직소’는 유명하다. 내용 중에 문정왕후를 과부, 명종을 고아라고 칭하였는데, 명종은 이를 보고 노발대발하여 조식을 엄벌에 처하려고 했다. 다행히 조정 신하들의 만류로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식의 상소대로 명종과 선조 시대의 조정은 부패했고,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 그러니 닥쳐오는 재앙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임진왜란이다. 그런데 그 대가를 왜 죄 없는 백성이 치러야만 하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이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는 왜 그렇게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단성소’의 일부분이다.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저버렸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일백 년이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해 나아갈 수 없어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하급 관리)은 시시덕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상급 관리)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물만을 불리면서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경관직 관리)은 자기의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외관직 관리)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은 생각에 장탄식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밤이면 멍하게 천정을 쳐다보고 한탄하며 아픈 가슴을 억누른 지가 오래입니다.
자전(慈殿:문정대비)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 내용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