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사, 화엄사, 운조루, 연곡사, 쌍계사, 칠불사
아침을 먹고 천은사부터 들렀다.
수홍루에 가까이 갔을 때, 계곡을 배경으로 창을 열심히 연습하는 분들을 보았다. 남이 보든 말든 추임새도 넣고, 손동작도 크게 하면서 있는 힘껏 소리를 뽑아내며 연습하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다. 나 같으면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자리를 펴고 앉아있지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천은사의 이름은 구렁이와 감로수에 얽힌 전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이광사의 유려한 필체로 쓰인 현판 글씨를 만나볼 수 있다.
화엄사는 세 번째로 방문한다.
지난번 오후 늦게 입장료도 안 내고 들어왔을 때, 저녁 6시가 되자 법고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법고 치는 스님의 숙련되고 화려한 몸짓, 그렇지만 무질서하지 않고 절제된 동작과 무겁지만 리드미컬하게 역동하던 법고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언어와 문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나로서는 그때 그 법고 소리를 담아낼 재간이 없다.
동영상으로 찍지 그랬냐고?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그럴 생각조차 못했다. 법고 소리가 울리는 순간, 속수무책 넋을 잃고 바라봐야 했으니. 그리고 석양을 배경으로 범종을 치던 스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었는데, 내가 볼 때는 참 아름다웠던 듯하다.
각황전과 석등, 석탑과 사자석탑은 다시 보아도 멋있었다.
대웅전과 각황전의 크기를 비교해 볼 때, 각황전이 훨씬 더 크지만, 가람배치를 절묘하게 해 놓아서 대웅전이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은 4 구역, 각황전에 오르는 계단은 3 구역인 것도 대웅전에 무게가 실리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대웅전은 1층 팔작지붕이고, 각황전은 2층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훨씬 커 어쩔 수 없이 더 화려해 보인다. 이번에도 사사자삼층석탑은 보수공사 중이라 보지 못했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다보탑과 함께 대표적인 이형석탑이라는데.
운조루를 이어온 가문의 전통을 보면서 해남 윤씨 녹우당이 떠올랐다. ‘타인능해’의 아름다운 전통이 바로 이 운조루에서 나왔다. 운조루는 영조 52년 유이주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 오면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 있는 뒤주와 굴뚝은 꼭 눈여겨봐야 한다.
뒤주는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헛간에 놓아두고,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문을 항상 열어 두었다고 한다. 굴뚝은 외부에 두지 않고 건물 앞 기단 사이로 연기가 빠지도록 설계해, 앞마당으로 연기가 낮게 퍼지도록 하였다. 이는 어렵고 가난한 이웃에게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연곡사에서는 정말 환상적인 승탑들을 보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기단에서 보주까지 눈에 새겨 넣으려,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 소요대사탑, 현각선사탑(북승탑), 도선국사탑으로 추정되는 동승탑을 연이어 보았다. 다른 사찰의 승탑과 비교해 보면, 연곡사의 승탑들이 왜 아름다운지를 대번에 알아챌 수 있다. 연대도 더 오래되었는데 심지어 보존상태도 좋다. 시대정신이 퇴보한 것인지, 예술이 퇴보한 것인지, 아니면 예술이라는 것은 단순함과 화려함만으로 가늠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것을 어쩌랴.
세 개의 탑 모두 8각 승탑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동승탑은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 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졌다. 북승탑은 동승탑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이다. 소요대사탑은 탑신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 효종 원년(1650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오히려 오래될수록 조형성이 뛰어나고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쌍계사로 들어가는 길은 환상적인 벚꽃 길이다. 봄에 왔다면 아름다운 꽃 터널을 지났을 텐데 아쉬웠다. 칠불사의 사무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가 왠지 매끄럽지 못했다. 괜히 쌍계사 얘기를 꺼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아니면 커피를 한 잔 달라고 해서 기분이 나빠진 건가? 아니면 내가 남자라서? 이유야 어찌 됐든, 절마다 유명한 고승이 세웠다느니, 역사가 오래되었다느니 하는 것들이, 일종의 자부심 내지 자존심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오늘 점심과 저녁은 가격에 비해 상차림과 맛이 최하였다. 성질이 나서 반찬을 두 번 시켜 먹었다.
텐트 칠 자리를 찾던 중, KBS 드라마 제작팀을 보게 되었다. 드라마 ‘녹두전’을 찍는단다. 연예인을 볼 수 있을까 하여 이리저리 둘러 보았는데, 촬영이 끝났는지 모두 휴식을 취하고 있어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고소산성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 전망 좋은 덱이 마련되어 있어 그곳에 텐트를 쳤다. 바람이 시원하니 덥지도 습하지도 않다. 와이파이도 희미하게 잡힌다.
- '아자방지'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