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하회마을, 세계탈전시관, 부용대, 체화정 등
어제의 고단한 일정 탓에 늦잠을 자고, 7시 30분에 길을 나섰다.
가는 도중에 병산서원을 먼저 갈지, 하회마을을 먼저 갈지, 여러 번 망설였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병산서원과 주변 경관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병산서원을 먼저 보기로 하고 길을 잡았다.
4년 전 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관리인께 물어보니, 주차장이 옮겨진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하셨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병산 서원에서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만대루에 오르는 나무계단은 새로 교체된 것이 눈으로 확연히 보였고, ‘출입 금지’ 팻말이 걸려 있었다. 4년 전에는 계단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만대루에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만대루에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계단 앞에 서서 한참을 갈등했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샌들을 벗어놓고 살금살금 마루에 올랐다.
만대루에 올라보니 안개가 덜 걷힌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앞마당에 줄지어 심어놓은 배롱나무의 꽃밭이 펼쳐졌다. 고풍스럽게 색이 바랜 누마루의 바닥과 대들보, 기둥, 서까래들을 보면서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관리인께서 위험하니 내려오라고 하셨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내려왔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광영지도 아름다웠고,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양옆으로 화계가 잘 꾸며져 있었다. 도동서원이 규모 면에서는 더 크고 담장도 아름답지만, 만대루의 존재는 이 모두를 상쇄하고 남음이 있었다. 안개도 서서히 걷히고 있어, 낙동강 변에 나가 한참 동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병산서원을 거쳐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해 놓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버스를 타고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이유를 하회마을에 들어가 마을 전체 지도를 보고서야 알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11시였다. 미리 밥을 먹고 마을을 구경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식당을 잡았다. 메뉴는 헛제삿밥. 식당은 많았지만 조금 이른 시간이라 손님들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찾은 식당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다른 곳도 두리번거리다가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사람이 있으니 뭔가 있을 거라는 심리였을까? 연이어 여섯 팀이 왔다. 이 정도 되면 주인이 나의 공로를 인정해 줄 만도 하지 않을까? 게다가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홍보까지 해주었는데, 조기 한 마리라도 덤으로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조기는 고사하고 시원한 음료수 한 잔 없다. 역시 착각과 기대는 자유다.
하회마을 안내 지도를 따라가며 구경한 다음, 부용대에 올라 낙동강이 휘돌아 감싸는 마을의 전경을 보았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옥연정사, 그의 형 류운룡이 지은 겸암정사도 다녀왔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종갓집, 대갓집들만 보았지, 주위의 초가집들은 자세히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예전의 초라한 초가집들이 없지만, 그래도 관심사가 오로지 화려한 기와집들에만 쏠려있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류성룡은 작은 초가집에서 검소하게 살다, 삶을 조용히 마감했다고 한다. 옥연정사는 터만 잡고 재력이 부족하여, 승려 탄흥의 도움으로 10년에 걸쳐지었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이고,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지만, 문득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이 없어 건물도 짓지 못했다지만, 책을 읽고, 가르치고,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곁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거두어들여, 먹을 것을 공급해 준 사람들이 있다. 집을 청소하고, 상을 차리고, 온갖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던 사람들의 땀과 수고가 있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지 않을까?
체화정에 갔을 때는 비가 오고 있었다.
정자 앞에 연못을 만들어 놓았는데, 연못의 길이가 수십 미터는 족히 되었다. 물이 돌아가는 모양새에 따라 큰 섬이 두 개 정도 만들어지는 듯하였고, 정자 앞의 연못에는 세 개의 작은 섬이 있었다. 연못의 가장자리는 돌을 빈틈없이 쌓아, 얼핏 보기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자를 짓고, 정원, 원림을 경영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연못의 풍광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운치가 있고 아름다웠다.
체화정은 진사 이민적(1702~1763년)이 학문을 닦기 위해 마련한 정자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가운데에 온돌방을 마련한 것인데, 문화재청 설명을 보면, 이것은 지역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정자 사면에 난간을 둘러 연못을 바라보기 좋게 만들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운흥동 5층전탑과 법흥사 7층전탑을 볼 수 있었다. 지붕돌 위에 기와가 얹혀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운흥동 전탑이 화사하고 예쁘장하니 아담하다면, 법흥사 전탑은 투박하지만 웅장하니 기골이 장대한 남성을 연상시킨다. 저녁을 먹고 찜질방에 앉아 하루 일정을 복기해보고 나니 진이 빠졌다.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자야 할 것 같다.
안동 운흥동 5층전탑.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남북조시대)의 전탑으로 1962년에 복원한 것이다. 탑은 무늬 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는데, 몸돌에는 층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인 감실을 설치했고, 2층 몸돌에는 2구의 인왕상을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너비가 상당히 짧은데, 특이하게도 기와가 얹혀 있다. 이러한 지붕 모양은 감실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고 한다. 원래는 7층이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 내용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 이 탑은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1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과 지붕을 올린 형태다. 1층 몸돌에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고,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여 감실과 만나도록 하였다. 지붕돌을 보면 기와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는데, 운흥동 전탑처럼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면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기단에 시멘트를 발라놓아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