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일원
4일쯤 되니, 몸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많이도 돌아다녔다. 돌아다닌 곳만 14곳. 덕분에 입장료가 엄청나게 많이 나왔지만, 미리 가불 한 셈 쳤다.
배리삼존불 중 대세지보살이 가장 잘 조각된 것 같았다. 윤곽이며 미세한 구석까지 잘 조각되어 있어, 중앙의 본존불보다 많은 시간을 보았다. 한쪽으로 약간 머리를 숙이고 있어 귀여운 구석도 있다.
역사스페셜에서 보았던 ‘나정’ 이야기가 생각나서, 일정에는 없었지만 들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수혈유구’니 ‘구상유구’니,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도배되어 있어 이내 흥미가 사라졌다. 꼭 이런 말들로 밖에 문화유산을 설명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문 실력이 짧은 자신에 대한 한숨만 나왔다.
경주 오릉은 정말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고분 주위로 수많은 나무들이 풀과 어우러져, 덩그러니 솟아있는 다섯 개의 고분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방문했는지, 들어갈 때는 직원들이 없었는데, 나와 보니 직원분들이 계셨다. 정말 이른 시간에 와서 짧게 본다면, 공짜로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도 문화유산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입장료를 내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직원 한 분이 커피를 타 주셔서 감사히 먹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경주 배동에는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다.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놓은 것인데, 기본양식이 똑같다고 한다. 중앙에 본존불, 한쪽에는 관세음보살상, 다른 한쪽에는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안내문이나 문화재청 설명을 보면, 본존불에 대한 설명이 가장 많은데, 어쩐지 대세지보살상에 눈이 많이 간다. 이렇게 뚜렷하고 선명한 윤곽을 가지고 있는데, 7세기 신라의 작품이란다.
경주 오릉은 신라 초기 박 씨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왕들과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부인의 능이다.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봉토 형 무덤인데, 1호 무덤은 높이가 10m(현장 안내문에 따르면 7.86m)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 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라고 한다.
- 내용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대릉원에 들어갈 때는 비가 내렸다. 대릉원 역시 고분들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고분 가운데 천마총만큼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었다. 마침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이것저것 설명해 주시는 바람에 옆에서 얻어들을 수 있었다.
천마총 <장니 천마도>. 장니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 그림이다. 혀를 내민 듯한 입의 모습은 신의 기운을 보여주는데, 이는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천마의 모습 및 테두리의 덩굴무늬는 고구려 무용총이나 고분벽화의 무늬와 같은 양식인데, 신라 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천마도는 신라 회화로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가치가 크다.
- 내용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분황사로 모전 석탑을 보러 갔다. ‘모전’이라는 말은 전탑을 모방했다는 소리인데, 전탑은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은 탑이다. 모전 석탑 양식을 처음 보는 것이라 내심 기대가 많았다. 막상 옆에서 보니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아름답고, 규모 또한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보아야, 보다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김정희의 손길이 여기까지 미쳐있었다. 역시 금석학의 대가답다.
비가 왔지만, 한참을 걸으며 황룡사지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본 곳 중 미륵사지가 가장 컸지만, 황룡사지는 그보다 더 큰 것 같았다. 황룡사를 다 돌아봤을 때,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 중이라 쉴 곳도 마땅치 않았다. 어디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곳저곳 살펴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몸에 몸살 기운이 있는지 으슬으슬하고 몸도 무거웠다. 비를 맞으며 다음 답사지인 보리사에 갔다.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는 3층까지만 남아있는데, 원래는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기단은 무척이나 넓은데 자연석으로 만들었고, 네 구석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올려놓았다. 탑신과 지붕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놓았는데, 그래서 순수한 ‘전탑’을 모방한 ‘모전’ 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선덕여왕 3년에 건립되었으며,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보리사 스님들과 몇 마디 대화도 나누고, 석조여래좌상도 보았다. 비가 많이 내려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잘 찍으려 노력하다 보니, 비도 맞고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사진을 찍은 후 우산을 쓴 채 한참 동안을 바라보았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한국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석굴암과 본존불이라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몸살 기운에, 몸도 무겁고, 비도 쏟아지지만, 고생 끝에 마침내 만나게 된 불상이기에, 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 비가 와서 그런지 훨씬 청명하고 말끔하게 보인다.
석굴암 본존불은 습기 때문에 본체가 상할까 염려하여 일 년 내내 보일러와 가습기를 돌리고, 혹시 생길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리 가림막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전혀 이질적인 목조 전각은 없는 것만 못하지만, 적어도 비를 맞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불상은 자기를 보호해 줄 무엇하나 가진 것이 없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과 똑같이, 전각도 없이 비를 오롯이 맞으며 자비한 얼굴로 앉아있는 모습이, 본존불보다 훨씬 고상하고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경주 남산 불곡 감실 부처는 엄마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할매 부처’라 부른단다. 바위를 깊게 파내어 그 안에 조각해 놓았는데,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도 비에 젖지 않는다. 어쩐지 자꾸 찾을 것만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
탑곡 마애불상군을 봤을 때, 저렇게 커다란 바위에 그토록 많은 불상을 새긴 사람의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번뇌가 가득한 세상을 피해, 이곳에 어떤 이상향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살고 싶었던 것일까?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는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해 놓았는데, 여러 보살상과 함께 승려, 비천상, 보리수, 목탑 등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상이 한자리에 새겨진 예는 드문 경우인데, 특히 2기의 목탑은 세부적인 표현이 충실하게 나타나 있어, 신라시대 목탑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신문왕묘는 호석, 갑석, 받침석, 모두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진평왕릉도 하나의 고분 주위로 잔디밭과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선덕여왕릉은 안타까웠다. 산으로 오르는 좁은 길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왠지 당당한 여성 왕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김유신 묘는 그것 하나만을 위해 입장료를 지불해도 될 만큼 잘 가꾸어져 있다. 사실 들어가는 길도 그렇거니와 무덤의 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다. 호석과 갑석들, 무덤을 둘러싼 돌난간, 12 지신 상들의 디테일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과 품격을 더해준다.
데이터가 모두 소진됐다. 내일부터는 인터넷 결제도 안 되고,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에서만 검색을 해야 한다. 머리가 답답하고 몹시 피곤하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많은 곳을 보아서 그런지 뿌듯하다.
신문왕릉은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 무덤이다. 둘레돌(호석)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5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다. 호석 주위로는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을 세워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게 하였다.
선덕여왕릉은 높이 6.8m, 지름 23.6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 무덤이다. 무덤의 밑둘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쌓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자기가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 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 정상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 내용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진평왕릉은 높이 7.9m, 지름 36.4m의 원형 봉토 무덤이다. 원래 무덤 밑둘레를 자연석을 이용해 둘렀다고 하나, 현재는 몇 개만 남아있다. 왕릉 주변이 무척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김유신묘는 지름이 30m로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매우 잘 꾸며져 있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이 있는데, 12 지신을 조각한 것과 없는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그 옆으로는 바닥돌을 깔았고, 바닥돌 위로는 돌난간까지 둘러놓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하였다고 한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둘레돌에 12 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남북조시대) 이후에 보이는 무덤 양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