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 태종무열왕릉, 진흥왕릉, 국립경주박물관
화랑체육공원에서 시끄러운 기차 소리와 함께 잠을 잔 뒤, 깨어보니 6시가 되어 있었다. 텐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어, 비가 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텐트 바닥이 멀쩡하니 비가 오지는 않은 것이다. 수건으로 안쪽을 모두 훔쳐내고, 바깥쪽도 닦아냈다.
하늘이 밝아오고, 축구장 쪽에는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부자리를 다 정리한 후, 해가 비추는 쪽으로 텐트를 들어 옮겨 말렸다. 이렇게 1시간 30분가량 부산을 떨고, 반구대 암각화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걸어서 들어가는 길은 설렘에 더 싱그러웠고, 주변의 풍경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는 길에 공룡의 발자국이 있다고 해서 보았으나,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을 뒤져 찾았는데, 찾아내고는 실소를 지었다. 이게 공룡 발자국이라고?
반구대 암각화는 계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햇볕이 암각화를 정면으로 비추는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는 와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내가 간 시간은 이른 아침 시간이니, 그늘이 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강을 두고 멀리 떨어져서 망원경으로 봐야 한다.
암각화를 본떠 선명하게 그려놓은 그림과 비교를 하고, 안내원께 문의해서 자리를 잡아달라고 요청하고 물어보기를 십 여 차례. 결국 본 것은 멧돼지 한 마리였다. 힘이 빠져 다음 장소로 향하려다, 발걸음을 되돌려 한 번만 더 보기로 하였다.
중년 부부가 암각화를 보러 오셨길래, 자리를 잡아드리고 설명을 해드렸다. 그런데 남편 분은 고래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멧돼지도 보이고, 잘만 보인단다. 아내 분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데. 뭔가 달라진 게 있는가 싶어 나도 같은 자리에서 들여다봤는데, 역시나 멧돼지만 보인다. 정말 보이는 것인지, 보인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안 보이는데도 보인다고 하는 것인지. 혹 눈이 정말 좋아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정말 그 속을 알 수 없다.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가려내지 못하는 사람의 이런 부족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 것뿐이다.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진실을 모두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소리일까? 그렇다고 사람이 모든 진실을 알 수 없으니,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절대적인 가치를 세우려는 사람들과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개인이 직접 방문하면 암각화를 가까이에서 보기 어렵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도록 되어 있는데, 사실 잘 보이지 않는다.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려면, 암각화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대곡천 답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암각화 건너편 모래사장에서 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암각화를 해가 정면으로 비추는 오후 3시로 하는 것이 좋다.
공룡 발자국을 보려면 천전리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 발자국 모양도 다양하고 발자국이 131개나 된다. 암각화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어 선명하게 보인다.
천전리 각석에는 청동기 시대 암각화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의 명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을사명’과 ‘기미명’이 그것인데, 을사명은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에 천전리 계곡에 다녀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고, 기미명은 사부지갈문왕의 부인 지몰시혜가 어린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명문들은 6세기 신라 정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한다.
태종 무열왕릉을 시작으로 경주 여행이 시작됐다. 월요일인데도 경주 박물관은 열려 있었다. 신라역사관부터 미술관, 특별관, 월지관, 주변의 석탑과 조형물들까지 빠짐없이 둘러보고 카메라에 담았다. 배터리는 30% 남았고, 시간은 4시간 20분이 지나 있었다. 다리는 아프고 몸은 피곤했다.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 안내문의 설명에 의하면,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는데, 종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아이가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라의 전설이 망라된 조선 후기 읍지인 『동경잡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1920년대 종을 보다 신비롭게 보이도록 지어낸 이야기로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상원사 동종(국보),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는 이 종을 보면서 “시대정신이 퇴락하면 다시는 정신이 되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는데, 자세와 정신에 대해 논한 것이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에밀레종의 타종 소리를 복원하지 못하는 것은 자세와 정신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만든 ‘종’ 걸이용 쇠막대(8.5cm)는 22톤에 이르는 에밀레종의 무게를 지탱했으나, 현재의 기술로는 15cm 두께는 되어야 가능하다. 이는 과거 신라 ‘단조기술’의 비법이 숨어 있는 것이다. 거푸집 또한 놀랍도록 견고하다.”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토우. 토우는 장난감이나 애완용, 주술용,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 등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문명 유적에서 나오는 신상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진시황릉에서 발견되는 ‘병마용’도 일종의 토우에 해당한다. KBS에서 방영된 역사스페셜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토우는 신라에서만 발견된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가야에서도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가야 역사유물관을 방문해도 토우는 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역사스페셜의 내용이 맞는 것 같다(관심이 있는 분은 확인해 보기 바란다).
신라의 토우에는 인물, 동물, 가구, 수렵, 배, 악기, 집 등 다양한 형태가 망라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성행위를 묘사한 토우도 볼 수 있는데, 성을 수치스럽고 은밀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의 즐거움으로 여긴 신라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신라에서는 왕(지증왕)의 은밀한 부분까지 소문으로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이 또한 신라인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말해준다.
이차돈의 순교비. 이차돈은 법흥왕과 당숙(5촌) 사이라고 한다. 당시 신라는 왕은 있었으나 여섯 개의 지배 집단이 사실상 분할 통치하고 있던 시기(6부 연맹체)였다. 법흥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승부수를 던지는데, 그것이 이차돈의 순교 사건이었다. 당시 6부의 지배 집단들은 각각 자신들만의 성지에서 제사를 지내는 민간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토착신앙에 뿌리를 둔 귀족들의 기득권을 누르지 않고서는 효율적인 통치를 기대할 수 없었다. 법흥왕에게는 이를 위한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고, 그것이 불교가 가져올 수 있는 이념, 곧 ‘왕즉불(왕이 곧 부처다)’ 사상이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당시 형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더니 꽃비가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차돈은 처형 직전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그 예언이 맞아떨어지자 불교 공인을 반대하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법흥왕은 이차돈이 순교한 뒤 폐허가 되었던 흥륜사를 재건하였다. 사진 속의 순교비에는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자리에 흰 젖이 솟구치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차돈의 잘린 머리가 떨어진 곳에 자추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차돈의 순교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명분을 얻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사건이었다. 고구려, 백제가 이미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아직 6부 연맹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신라를 도약시킨 사람이 법흥왕이라면, 그 중심에는 이차돈의 순교 사건이 있었다.
24시간 찜질방이 있어 찾아왔더니, 8시간 기본 13,000원,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천 원의 추가 요금이 붙었다. 24시간은 18,000원이었다. 찜질방 문화가 쇠락한 것인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역시나 가격이 부담스럽다. 머무는 시간을 되도록 줄여보려고 한 곳을 더 보고 오기로 했다.
노서동 고분군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봤더니 고분으로 이뤄진 공원이었다. 한 바퀴 돌면서 정담을 나누는 커플들과 가족들을 보았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성큼 뛰어넘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텐트를 칠 때 되도록 햇볕이 빨리 드는 쪽으로 쳐야겠다는 생각을 잊을 뻔했다. 정말 중요한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