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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그냥 하자

러닝 3일 차

by Eun

아침에 문상을 갈 일정이 생겼다. 어제 문자를 받고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오후에 일을 하는 직업이라 퇴근이 늦고, 문상 갈 곳이 2시간 거리여서 만약에 일 마치고 간다면 새벽에 집에 돌아오게 될 텐데 그럼 서로 죄송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8시쯤 출발해야 하니 운동은 하루 쉴까?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안 되지 않을까?'
머릿속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문장들이 참 싫다.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어떤 상황에서 늘 나타나는 회피형 문장들. 나는 그런 문장들로 싸여있는 것 같다.

"띠리리링~~"
5시 20분이다. 오늘은 러닝 3일 차다. 기록 앱을 켜고 달리기 시작한다. 3일째 보는 동네 해안가 도로다. 남쪽 바닷가 마을에 살면서 매일 보는 바다지만 나름 타지인들에겐 인기 있는 바다다. 갯벌에 물이 차고 있다. 짧지만 굵직한 소리를 내는 파도를 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러닝을 하면서 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가 나를 가볍게 지나치고 뛰어간다. 안정된 자세에서 고수의 향기가 난다.(저런 자세로 달려야 하는구나)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가 라디오를 들으며 뛰어간다.(저렇게 하면 심심하지 않겠다) 검은 민소매 할아버지가 뛰어간다.(역시 잘 달리시네.)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이야기를 하며 걷는다.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제는 저쪽에서, 오늘은 이쪽에서 작업을 한다.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마주 오던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저기.. 운동하는데 미안한데 뭐 하나 물어봅시다."
"헉헉~ 네."
이때는 숨 고르기를 한 뒤 다시 뛰는 중이었다.
"저쪽에 그물 치우는 거 혹시 봤어요? 한... 10일 전 일인데."
"아... 못 봤어요. 저 운동한 지 3일째라..."
"아... 난 이 시간에 자주 본 사람 같아서 아는 줄 알고.. 알겠습니다."
서로 머쓱한 시간이 지나고 아저씨는 홀연히 자기 갈 길을 간다. 이제 운동을 시작한 초보라는 사실이 드러나 당황했지만, 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뛴다. 숨이 찬다. 되는 데로 코로도 호흡했다가, 입으로 호흡했다가를 반복하며 열심히 폐에 산소를 공급한다. 벌린 입에 침이 고인다. 거친 숨 사이에 꼴깍~침을 삼킨다. 무거운 다리로 헉헉거리고 침을 삼키며 뛰는 내 모습이 저 아저씨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진다.
반환점을 찍고 되돌아오는 길에 정박해 있는 낚싯배들과 쌓여있는 부표들을 본다. 좀 전에 만난 아저씨의 말이 생각나 저 모습들도 눈에 담는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운동한 지 3일째'란 말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냥 못 봤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쓸데없이 '운동한 지 3일째'라고 말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난다. '참 피곤한 성격이네'라고 생각하며, 파워워킹을 하다가 눈으로 다음 목표지점을 정하고 뛰어본다. 힘을 주면서 뛰었는지 어깨가 뭉치는 것 같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뛴 것 같은데 그만 뛰고 걸을까?'
또다시 타성에 젖은 문장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말들, 포기하라는 유혹에 흔들거리는 내가 보인다. 타고나기를 성취욕이란 것이 없다. 천성이 게으르기도 하다. 별것도 아닌 말에 신경이 쓰이고, 주기적으로 숨고 싶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하게 운동하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내 머리는 지금 혼돈 그 자체다.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그냥 하자. 그리고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자.'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해야 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지 말자는 유혹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상황은 늘 생긴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면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애매한 상황이 오기 때문에, 이런 고민이 될 때는 말 그대로 '그냥'해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라며 '그냥' 했던 일들은 되돌아볼 때 미련이 남지 않지만, 하지 않고 지나가버린 일들은 찝찝한 기분을 남긴다.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겠어!(갑자기 이런 대사가 떠올라 속으로 외쳤다) 그만 뛰고 걷고 싶다면 더 뛰어보자.'
목표 지점까지 힘을 더 내어 뛰어본다. 침이 떨어진다. 옷으로 쓱 닦으며 솟아오르는 태양을 본다. 발끝에 매달려 마지막까지 대롱거렸던 필요 없는 생각들을 털어내며 오늘 운동이 끝이 났다. 평균 페이스 9분 43초다. 어제보다 줄었다. 러닝을 하는 건지 도를 닦는 건지 모르는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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