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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릴수록 오래간다

러닝 5일 차

by Eun

"띠리리리~~"
5시 10분이다. 어제는 비가 와서 운동을 하지 못했다. 날씨를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러닝 5일 차다.

아파트 복도에 불이 들어와 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계속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난다. 지난주에 마주쳤던 그 사람일 것이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사람, 지하층에 내리자마자 다시 계단으로 오르던 그 사람은 새벽마다 계단 오르기 운동을 하나보다. 나지막이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보다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이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는 소속감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공기가 시원하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러닝을 시작했다. 조금 달리다 보니 숨이 차기 시작한다. 급하게 호흡을 하느라 입이 벌어지고 침이 고인다. 목표로 정했던 나무까지 뛴 뒤 걸으며 호흡을 골랐다. 갑자기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생각만큼 올라오지 않는 체력 때문에 러닝이 힘들어지는 구간이 오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다. 아직은 초보라 힘든 건 당연한 것이다. 며칠 뛰었다고 안 힘들기를 바라는 것인가. 원래 러닝이 힘든 운동이다. 그래도 하기로 했으니 투정 부리지 말고 이겨내라고, 그래야 된다고 자신을 다독여본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목표를 정하고 조금 더 뛰며 자신을 채찍질해 본다.

며칠 전, 러닝을 시작하고 나서 근력운동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관절이나 척추를 보호하고 다치지 않으려면 근력이 있어야 한다. 나도 헬스장에 등록을 하고 근력 운동을 해야 다른 사람들처럼 러닝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과거 헬스장에서 PT를 받을 때 먹었던 보충제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검색을 해보니 '부스터', 'BCAA', '크레아틴' 같은 제품들이 보인다.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본다.
'뱃살이 많으니 가르시니아도 먹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제 식단도 조절해야 하니 단백질 셰이크도 필요할 것 같은데..'
원래 운동이 반, 식단이 반이라고 했다. 운동만 하고, 식단을 하지 않으면 별 효과를 못 본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 이것들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TV에서 보니 러닝 하는 사람들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달리는 것 같던데 그게 도움이 되는 걸까? 나도 나이가 있는데 필요하지 않을까?'
무릎 보호대를 검색하니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예뻐 보이는 것으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오~~ 핸드폰을 넣을 수 있는 작은 힙색도 있네. 이건 편하겠는데?'
검색을 하면 할수록 장바구니에 물건은 쌓여만 간다. 내 눈엔 다 필요해 보였고 꼭 필요한 제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받고 싶다. 도움을 받으면 더 잘 달릴 것 같고, 숨이 안 찰 것 같았다. 그땐 그랬다.

숨이 차 오를 때쯤 이제 그만 뛰고 걸을까 생각하다가 조금 더 느린 러닝을 했다. 느린 러닝.. 정말 걷는 것과 같은 속도의 러닝이다. 다리가 평소 걸을 때보다 아주 조금 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러닝이다.
'저기 나무까지만 이러고 뛰자. 아니 걷는 건가? 뭐 어때? 쉬지 않으면 되지.'
그런데 나무까지 도착했는데도 숨이 차지 않는다. 뭔가 에너지가 남아있는 느낌이다.
'어 이런 러닝 괜찮네. 좀 더 해볼까?'
평소처럼 숨이 격하게 쉬어지지 않고, 밸런스가 맞는 느낌이 든다. 쉬지 않고 반환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가는 길 역시 쉬지 않고 뛰어진다.
'어? 뭐지? 더 느리게 뛰었을 뿐인데 오래가잖아?'
도착지점까지 한 번 정도만 쉬었을 뿐, 계속 뛰어진다. 운동이 끝난 뒤에도 에너지가 남는다. 허리가 굽혀지지 않는다. 상쾌하게 운동이 마무리되었다.

남들이 말하는 슬로 러닝은 나에겐 '안 슬로 러닝'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 느려야 했다. 하지만 느리게 뛰지 않았다. 너무 느리게 뛰는 모습이 남들에겐 우습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초보 딱지도 빨리 떼고 싶었다. 무엇보다 힘들어야 운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힘들다는 생각이 운동 자체를 빨리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호기심에 도전하지만 힘들면 빨리 포기하는 나다. 나에겐 이 속도가 맞는 것 같다. 이 속도라면 거리를 조금 더 늘려도 될 것 같다. 기록을 보니 전체적인 속도도 떨어지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내일도 이렇게 뛰면 되겠다 생각하니 내일 걱정이 되지 않았다.

검색한 물건들은 아직 장바구니에 담겨있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담았던 물건들인데 오늘 러닝을 하고 나선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서 일어난 문제인데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의지는 또 다른 의지를 부른다. 계속 무언가에 의지하다간 결국 기대지 않고는 혼자 자립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오늘 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 어쩌다 보니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았을 뿐이고, 나중에는 저 제품들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나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단계다. 당분간은 느리지만 오래가는 초보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뭐 어때?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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