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골드 맨션. 건령이 50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3층 건물이다. 하늘과 맞닿아 있어 경치는 좋지만 그 경치를 보려면 반포장된 골목길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누가 이런 곳에 건물을 지었을까. 한때는 '로얄 골드'라는 이름처럼 이 동네에서 잘 나가는 건물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건물로 들어서는 골목길의 잡초 덩굴을 제거하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건물이 되었다. 한 집당 18평, 20평도 되지 않는 낡은 맨션에 사는 사람들 사정이야 다 거기서 거기다.
맨션을 지키는 경비 정상태에겐 이곳이 월급 받고 일하는 직장의 개념이 아닌 월세 없이 기거하는 주거의 개념이다. 정상태는 일찍 아내를 여의고 혼자 딸아이를 키웠다. 머리가 영특한 아이는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고 정상태는 그런 아이의 꿈을 응원해 주었다. 아내와 일구었던 집을 팔아 유학비를 마련하고 자신은 단칸방으로 옮겼다. 그런 아버지의 헌신에 눈물을 흘리며 꼭 성공해서 효도하겠다고 다짐했던 아이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정착했다. 정상태는 비행기가 무섭다는 이유로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보고 싶은 마음을 핸드폰 문자로 대신하고, 보내주는 사진으로 사랑을 확인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직장을 전전하던 정상태는 나이가 들고 몸이 하나씩 고장 나기 시작할 즘 동네 시장 단골 김밥집 사장 천문자가 자신이 사는 건물에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는 말을 들었다. 경비업무를 할 사람이 필요한데 월급이라고 주는 돈은 얼마 되지 않지만 숙식이 제공되고 매일 팔고 남는 김밥은 무상으로 제공해 준다는 말을 했다. 정상태는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했다. 이제 살면 얼마를 살고, 돈을 벌면 뭐 하겠냐는 생각을 했다. 혼자 조용히 살다가 그리운 아내 곁으로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천문자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살던 단칸방을 정리하고 로얄골드맨션 경비로 들어온 첫날, 정상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한쪽 벽에 세계지도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비실을 드나들 때마다 아이가 사는 나라를 손으로 문지르는 일이었다.
"아버지, 이번 연구까지만 하고 논문 마치면 한국으로 갈게요. 남편도 한국지사로 발령 신청했는데 회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는 엘리트다 보니 놔주지 않네요. 당장이라도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시잖아요, 살다 보니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요..."
"애써 올 필요 없다, 아버지는 잘 산다. 나 걱정은 하지 말거라. 이렇게 문자 하면 되지 뭐 하러 먼 길을 와."
"연구 끝날 때까지는 연락을 못 할 수도 있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문자 할게요.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보고 싶다..'
정상태는 이 말을 삼키고 말았다. 아이가 한국에 온다는 말은 몇 년 전부터 하는 말이었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챙기고 싶은 아이의 착한 마음은 고마웠지만 매번 '다음엔 꼭...'으로 시작하는 문자에는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괜찮다고 했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정상태는 이번에도 못 온다는 말이겠지라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경비실 안에 마련된 쪽방에서 정상태가 눈을 떴다.
"끄응~~"
몸을 뒤척일 때마다 곡소리가 나는 것이 이제 정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다. 아직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을 것이다. 전기장판 숫자를 확인한 뒤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잠을 청해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 엄마.... 죄송...."
주고받는 소리들이 모깃소리처럼 정상태의 귓가를 맴돈다.
"~~ 싫어요~~~ 잠깐~~~ 선아 엄마~~~"
'선아 엄마?'
정상태의 눈이 확 떠졌다. 금방 자신이 무슨 소릴 들은 것인지 되짚어 보았다. 분명 '선아 엄마'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정상태는 이불을 휙~ 젖히고 일어나 경비실 문을 벌컥 열었다.
경비실은 정상태와 천문자, 선아 엄마가 내쉬는 입김으로 가득했다. 로얄골드맨션에 오래 살았지만 경비실 안은 처음인지 선아 엄마 장말숙은 바로 앉지 않고 여기저기 힐끔거리다가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보더니 안 어울린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상태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온 천문자는 장말숙에게서 뺏은 가방을 경비실 책상 밑에 밀어 넣고는 책상을 등지고 앉았다. 장말숙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다가, 천문자의 눈치를 보더니 꼰 다리를 슬쩍 내렸다. 경비 정상태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한 봉 뜯어 넣고 김이 오른 커피포트의 물을 쭉 따른 뒤 커피 봉투로 휘휘~ 저었다.
"아 그 참! 작은 숟가락 없어요? 몸에도 안 좋다고 하는데 자꾸 봉다리로 저으실까?"
느릿한 정상태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던 천문자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보탰다. 멋쩍어진 정상태가 선아 엄마 장말숙에게 두 손으로 커피를 건넸다.
"아니~ 그러니까, 몇 번 안 젓고 얼른 빼서..."
"됐고! 선아 엄마! 정말 왜 이래? 이게 무슨 짓이야? 선아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순간 방심하고 커피를 마시던 장말숙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히려 작심한 듯 지지 않고 천문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도 참을 만큼 참았어요. 앞뒤 생각 없이 이렇게 행동하는 거 아니라고요. 선아... 를 위해서 집도 그대로 둘 거고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가끔 돈도 보내줄 거예요. 저 잘 살 자신 있고, 잘 살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선아 엄마 걱정해서 이래? 나가서 잘 살던지, 못 살던지 모르겠고, 선아는? 선아 자기 딸 아니야? 어느 엄마가 딸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해.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아니... 내가 야반도주를 하던 새살림을 차리던 할머니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니까... 평소 선아를 챙겨주고 하는 건 고맙긴 한데 그렇다고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오지랖 아니에요?"
"오지랖? 말 잘했네. 나도 오지랖 떨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야. 한가해서 이러는 건 더더욱 아니고."
천문자의 말처럼 한가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선아 아빠 사건이 있은 후 로얄골드맨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진 유리를 돌보는 일, 희망이를 잃은 선아를 돌보는 일, 하루 종일 아빠를 기다리는 시우를 돌보는 일.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조차 외면하면 이 보석 같은 아이들이 빛을 잃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태에게 부탁했었다. 혹시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정상태도 그런 천문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박영진의 도움으로 cctv를 단 뒤부턴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을 꼼꼼히 살폈다. 자신의 자녀와 문자를 하는 야밤에는 그리움에 묻혀 잠도 들지 못했기에, 그럴 때면 책상에 앉아서 쪽창문에 달이 가득 찰 때까지 cctv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정상태는 깨달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건물이었지만 그 속은 긴장과 혼란, 불안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럼 왜 그러는 거예요? 제가 혹시 빚 안 갚은 거 있어요?"
이런 정상태와 천문자의 마음을 모르는 장말숙은 혼자 독기가 올랐고, 그래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따졌다. 그러면서 눈은 자신의 여행 가방을 향하고 있었다. 빨리 이 늙은이들을 정리하고 가야 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빚? 말 잘했네. 저기 경비 양반, 그.. 그 핸드폰에 사진 있지요? 그거 좀 꺼내봐요."
"무슨 사진?"
"저 양반이? 아~~ 됐고! 그때 그 사진이요. 왜 사건 있기 전에..."
"아~ 그 사진! 알겠어요. 잠시만~ 어디 있더라~~ 여기 있네! 여기!"
정상태가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핸드폰에서 사진 하나를 찾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무슨 꿍꿍이들이실까? 사건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이게 뭐예요?
앙칼진 목소리로 핸드폰을 낚아채 들여다보던 장말숙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겁에 질린 눈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