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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Jul 18. 2024

사회성이 뭔가요?

늦는 아이, 독특한 아이 2


# 다른 너는 땡, 탈락


달라서 좋아요(글, 그림: 후세 야스코)


   애옹이(아들의 애칭)가 꼬마일 때 정말 많이 읽었던 동화책 '달라서 좋아요'. 심플한 그림체에 의미 있는 내용이 담긴 책을 도 나도 좋아해서 너덜너덜해지도록 참 많이도 읽었다. 동그라미와 세모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협력을 배우고, 나중에는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애옹이가 마주한 현실에서는 '다름'을 틀린 것으로 취급당했다. 자주, 다양하게, 때론 폭력적으로.


이가 꼬마 때 가시적으로 보였던 특이행동들은 크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조금 겪어보면 느껴지는 독특한 기질과 말투 결국 '사회성 부족'이라고 특징지어졌다.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곧 오답을 뜻했다. 조금 관대하면 '거북함'. 그래서였는지 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올라갈수록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른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 제가 지나가면 여자 아이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져요."


초등학교 5학년 초, 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애옹이가 아직 애기 같아서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없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어느 주말 우리 가족(남편, 아들, 나)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 영화가 끝나고 혼자 화장실에 다녀온 가 걸어오는 모습이 이상했다. 시선은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른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패닉 상태였다. 이유를 물어도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분노 섞인 말들만 중얼거렸다.


진정시키고 들어보니 아이는 같은 학급 여자아이들 여럿에게 몇 달째 욕설과 모욕적인 말들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날 하필(지금 생각하면 다행히도) 그 아이들과 마주친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애들을 찾아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무방비로 당해 정신이 아득해져 버린 아이는 그 애들이  방향을 알지 못했다. 내가 이리저리 헤매는 사이에 남편이 그 아이들을 찾아내 따끔하게 경고했다. (나였으면 달래고 타일렀을지도 모르겠다.)


돌아서서 가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은 어른에게, 심지어 자기들이 괴롭힌 아이의 부모에게 혼이 나고도 타격감도, 죄책감도 별로 없어 보였다. 우연히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도 그랬으니 학교에서는 얼마나 마음껏 수시로 그랬을까? 아이가 학교에서 매일 느꼈을 모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수다쟁이는 다른 말들은 재잘재잘 잘도 하면서 이렇게 중요한 얘기에는 왜 말을 아끼는 건지. 아이의 말을 조금 더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휴대폰 너머 들리는 신규 담임교사의 반응은 마치 결국엔 해피엔딩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처럼 해맑았다. (교통지도 하러 가서 봤던 소공녀 같던 모습이 그려졌다.) 결국 내 입에서는 '학폭'이란 단어가 나왔다. 교사들에게 학폭은 골치 아픈 민원임을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목소리의 떨림이 살짝 전해져 왔다. 아이가 당한 건 물리적 폭력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학교폭력'에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자의든 타의 선생님의 개입으로 가해 아이들은 우리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게 중에는 울면서 사과한 아이도 있었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아직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고 다행히 뉘우친다니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애들은 한동안 잠잠했을 뿐, 이후에도 괴롭힘은 계속 됐다. (사과하면서 운 건 분해서였나 보다.) 그렇다고 담임 선생님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축구경기 주심처럼 선생님이 매번 휘슬을 불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아이 스스로 폭력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가르치고 말았다.


 "애옹아,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차라리 때려. 같이 욕이라도 해. 엄마, 아빠가 다 책임질게."


홧김에 말은 했지만 마음이 약해 공식적으로 때려도 되는, 아니 때려야만 하는 태권도 겨루기 때도 눈을 질끈 감고 솜방망이 주먹을 날린 우리 애옹이는 결코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날엔 저도 당할 수만은 없었는지 가해 아이들을 향해 욕을 했다고 한다. (애옹이는 생각보다 다양한 욕을 알고 있었다 ○_○) 순하게 당하기만 하던 애옹이의 반격은 꽤 먹혔모양인지 그 후로는 괴롭힘의 수위나 빈도가 많이 낮아지기는 했다. (이런 '강약약강' 꿈나무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탈리오 법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 효험을 본 애옹이는 한동안 욕쟁이로 살았다.



#  네가 좀 별로


   그래도 그땐 아이 곁에서 편을 들어주는 친구가 한둘은 있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6학년이 되면서 친한 친구가 전혀 없는 학급에 배정이 돼버린 애옹이는 한 반이 된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지만 애들은 좀처럼 친구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직한 6학년 담임은 학기 초에 자신의 포부를 담은 편지를 학부모들에게 보내왔다. 젊은 선생님다운 의욕이 엿보여 우리 아이에게도 열린 마음을 기대했지만 그 의욕은 본인이 인정하는 아이들만을 향했다. 겉도는 아이를 위한 어떤 노력도, 관심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노력이 의무가 아니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나로서는 교사로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학급 내 '인싸' 아이들과 '꼬꼬마대장' 놀음에 심취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무슨 마음으로 선생님이 된 걸까? 궁금한 마음에 담임교사의 카카오톡 프사 이력을 보다가 화면을 내리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교복 입은 여학생의 어깨를 감싸듯 팔을 두른 채 얼굴을 밀착하고 찍은 셀카 사진을 보면서 '보기 불편한데? 요즘은 보통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학급에서 고리대금업자가 등장했다. 아이가 등굣길에 다급하게 4천 원만 달라고 했다. 평소랑 다른 느낌에 추궁하니 그 대부업꿈나무에게 언젠가 1,500원짜리 닭꼬치를 얻어먹었는데, 시간이 흘러 이자가 붙었으니 4,000원으로 갚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와우! 무슨 산*머니도 아니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 지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선생님?" 나의 물음에 담임은 아이들끼리의 거래이니 지켜야 한다는 답을 보내왔다. (!!!) 어쩔 수 없이 4천 원을 들려보냈다. 아이가 수두에 걸려 며칠 째 결석을 해도 안부조차 묻지 않는 그를 보면서 모든 기대를 깔끔하게 버렸다. 아직 어려 경험과 이해의 폭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이건 자질과 태도의 문제 같았다. 그저 시간이 얼른 흐르기만을 바랐다. 


학기 초 상담 때가 떠올랐다. 아이가 누구와 친하냐는 물음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적 있는 친구들 이름을 언급하니, "그래요? 그 애들이랑 노는 거 못 봤는데..."라고 담임은 대꾸했다. 당시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찜찜했던 이유를 뒤늦게 알 것 같았다.  속뜻은 아마도 '걔들이 얘랑 놀아준다구요?'

그의 학급에서 애옹이는 비주류로 등급 매겨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이도 선생님이 자기에게 매긴 등급을 고스란히 느꼈다.


브런치를 시작한 후로 틈틈이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그중엔 교사로서 사명감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는 글들도 많았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최고의 직업으로 각광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 교사는 힘들다는 표현으론 부족할 만큼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에 나는 마음이 동해 응원을 담아 뜨겁게 라이킷을 누르곤 한다. 당시 아이가 이런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도 해보면서 말이다.


6학년 담임 몇 해 전부터 교단에 설 수 없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 소식을 들은 무렵, 그가 아이에게 졸업식날 건넸던 미안함을 담은 편지를 뒤늦게 발견했다.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 사회성, 그까짓 거


   애옹이는 타인에 대한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의 험담을 한다든지, 샘을 낸다든지 하는 경우도(전혀라고도 할 만큼) 거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아야만 할까? 특히  2년간은 평생 어딜 가든 이렇게 어울리지 못하고 미움받으면서 살까 봐 걱정되고 마음 아픈 날들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코로나와 함께 시작된 원격수업이 나는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몇 명의 아이들과 처음으로 무리친구를 이루어 단단하게 유대감을 쌓았다. (와! 이런 날이 오다니!) 친구들의 이름을 모두 외워가며, 내가 더 안도감을 느끼던 그즈음에는 애옹이에게 남아 있던 독특한 느낌도 많이 사라졌던 것 같다. 긍정적 또래관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이듬해 중3이 된 애옹이는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했다. (아이가 친구 이야기를 하면 내 귀는 언제나 쫑긋 세워진다) 나는 이제 새로운 친구도 어렵지 않게 사귀는 이를 보며 마음이 놓였다. 하루는 아이가 그 친구의 성적표를 우연히 봤는데 처참하더란다. 애옹이의 표정에 안타까움묻어났지만 나는 속으로 '저나 잘하지. 남 걱정은~'하고 생각했다.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그 친구를 보고 나서 애옹이의 표정에 담겼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아이에게 물어보니 그제야 그 친구는 특수학급과 일반학급을 병행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애옹이는 내가 묻기 전까지 '특수교육대상자'를 그 친구의 특징으로 구분 짓지 않았지만 친구의 성적을 보니 걱정은 됐던 것이다. 


"그래도 걔 착해 엄마~ 얘기해 보면 말도 잘 통해."라고 덧붙인 아이의 말은 담백했다. 선심 쓰는 느낌도 생색도 없었다. 나는 그랬던가? 아니다. 나는 국민학교 때 반에 한둘씩 있던 그 아이들을 '특수반'으로 표현했었다. 그래서 아이의 편견 없는 그 마음이 기특했지만 칭찬은 하지 않았다. 애옹이는 그게 너무 당연한데 칭찬하는 내 입이 생색을 가르칠 것 같아서. 단지 꿀 떨어지는 눈으로 길게 한 번 바라보았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나는 아이를 통해서 배우는 게 많다.


영문도 모른 채 (그 애들 나름 거슬리거나 짜증이 유발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정당화하긴 어렵다.)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지만 아이의 마음은 타인에게 열려 있었다. 우리가 읽은 동화책 속 동그라미와 세모처럼. 심지어 아이는 자기를 괴롭히고 무시했던 아이들과 중고등학교에서 한 반이 되어서도 (스트레스 없이 혹은 친해지기도 하며) 지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마음, 나도 갖고 싶어서 물어보니 자기가 겪은 부당한 상황에 매몰돼있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을 실수나 철없어 한 행동 정도로만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하... 나는 조금 어렵겠다. 그리고 엄마 마음은 한편으로 너무 쉽게 용서하지 말고, 방어도 좀 하고, 처세도 좀 할 줄 알았으면 하는 바람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이미 때가 탔나 보다.


현실에서는 동그라미와 세모의 멋진 협력이란 동화 같은 결말은 좀체 일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를 보면서 희망을 가져본다. 틀린 것이 아니라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동그라미와 세모와 애옹이처럼.


사회성 그까짓 거, 좀 떨어진다고 평가받으면 어떠랴. 더불어 살 줄 아는 아이의 내면은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것처럼 풍요로울 것만 같다.

"엄마도 노력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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