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ojiya Jul 11. 2024

자폐 스펙트럼과 회복탄력성

늦는 아이, 독특한 아이 1




# 늦는 아이


   우리 아이 자라면서 많은 것들이 늦었다. 유치도 늦게 나고, 걸음마도 늦고, 말도 늦고, 이갈이도 늦었다.


그러  문제없었다. 유치가 늦게 나온 건 영유아기 치아관리에 오히려 좋았고, 때가 되니 흔들리고 빠지고, 영구치가 새로 돋아났다. 아랫니가 좀 삐뚤빼뚤해 교정을 해줘야 하나 고민이지만 충치가 잘 생기지 않는 건강한 치아를 타고났다.


한여름에 따땃한 기모바지를 꺼내 입을 정도로 외모 꾸미기에 관심도 없는 녀석이 작년에는 갑자기 자기 이가 너무 누렇다며 미백을 겠다고 해서 나를 당황시켰다. 이 간극 도대체 무엇인지. 결국 스케일링받으러 간 치과에 물어보고 이 정도가 보통치아색이란 말을 듣고는 (차라리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추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고등학생 맞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늦었던 말도 두 돌이 지나니 문장으로 줄줄줄. 어마어마한 수다력을 뽐내고, 태권도와 검도로 단련되어 (우리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오진' 다리는 산티아고 순례길할 것 같다.


* 오지다: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다.


아이마다 때가 다른 것뿐이니 또래보다 조금 늦는 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처음 유치가 빠진 날, 아이는 나에게 우리만의 케이크를 만들어서 축하하자고 제안했다. 내 욕구를 잘 표현하지 못했던 난 아들의 그런 면이 귀엽고 좋다.




# 독특함


   그러나 아이의 독특한 성향은 고등학생인 지금까지도 엄마, 아빠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남편과 TV 볼 때 '기안84'(웹툰작가, 예능인)가 나와 말하는 모습을 보면 둘이 거의 동시에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한다.


"애옹이(아들의 애칭) 같아."


보는 눈은 비슷한지 얼마 전 아이가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두 살 아래 동생과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둘이서 몇 마디 나눈 뒤에 그 애는 자기 엄마에게 이르듯이 말했다.


"엄마~ 형 기안84 같아~~"


남편과 듣고 둘이 웃었다. 100%의 데칼코마니는 아니지만 확실히 비슷한 결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안84가 연예대상 받을 때 나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예능프로 '나 혼자 산다'에서 다른 패널들에게 은근히 구박당하는 것처럼 보였던(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 도저히 연출된 거라볼 수 없는 만의 소탈한 매력으로 인정받는 모습은 꼭 우리 아이가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미루어 짐작되겠지만 독특함을 진하게 풍기는 우리 아이는 (나는 기안 84도 우리 아이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혹은 눈치가 없다고도 한다. 때문인지 학교생활이 늘 쉽지 않았다. 따돌림도 당하고, 싫어하는 교사들도 많아서 '모난 돌'이란 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주책바가지(내 친구의 표현) 아들의 학교 생활이 지금까지도 걱정인 것이다.


포르피와 기안 84의 우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시즌 4도 기대된다 ^^ 두근두근)



# 아스퍼거 증후군


엄마 얼굴(2010, 부러뜨린 모기향)


   애옹이 자라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보였다. 얼굴처럼 생긴 그림이나 사물을 보면 수줍어하면서 그것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한다든지, 주차장에서 차가 드나들 때 나는 경보음을(그러다 나중엔 경보기 자체를) 극도로 공포스러워한다든지. 약간 허름한 식당에 가면 안 좋은 냄새가 난다며 참기 힘들어하고, 바닥이 찝찝해 자기 엉덩이 붙이고 앉기 싫어서 엄마 무릎에만 앉았다. 감각이 예민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모든 감각이.


언어적인 면에서는 말이 유창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일상적이지가 않았다. 동화책에 나올 법한 문어체현학적말투였고, 그냥 머릿속에 입력된 문장을 꺼내 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르신들은 어린애가 말 잘한다고 손뼉을 쳤지만 우리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대한 몰입도가 매우 높아서 무언가에 꽂히면 아주 끝장을 보았다.


남편은 그런 행동들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해 정보를 찾아보니,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징이 대부분 아이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 : 아스퍼거 증후군


 내용을 보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진단을 받고 잡아주기 위해 소아정신과를 두 군데 가 보았는데, 반응이 참 극적이었다.  의사우리 부부의 연애사까지 물어보며 바로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고, 다른 의사는 멀쩡한 애를 왜 데려왔냐고 했다. 부모가 아이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면 아이도 다 느끼니 그러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너무 상반된 의견에 판단이 쉽지 않았다. 전문가의 의견이 갈리는 것으로 보아 아이는 경계선에 있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 꺼내려는 아빠, 기다리는 엄마


   그래서 치료는 받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이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너무 큰 불편함이나 외로움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남편과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평범함' 쪽으로 이끌고자 하는 목적은 동일했지만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남편은 아이를 자기만의 세상 밖으로 꺼내기 위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호랑이처럼 엄격하게 대했다. 거기에는 '얘는 왜 이렇게 별나서 나를 힘들게 할까?'라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그런 태도에 나는 마음이 아프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아이의 성장과정 내내 아이를 과업처럼 여기고, 아이의 사랑스러움거의 누리지 못하는 남편이 안타까웠다. (남편을 20년 가까이 겪고 난 지금에야 그것이 어리고 불안했던 아빠의 책임감이었구나 싶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세계가 궁금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해주고 싶었다. 독특한 면이 분명 있지만 깜짝 놀라게 하는 명석함있었다. 믿고 기다려 주면 젖니가 빠지고 간니가 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기 세계와 바깥 세계를 융화시킬 수 있을 같은,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타고난 게 대책 없는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유년시절 내가 엄마로부터 받지 못한 절대적인 지지에 대한 대리만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에 기인했건 나는 내 눈에는 너무나 귀여운 생명체를 무척 사랑했고, 바로잡아주는 과정에서도 아이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바람일 뿐이었고, 우리의 양육방식의 차이는 잦은 다툼을 불러 아이 앞에서 크게 싸운 적도 많았다. 남편은 내가 무작정 아이를 감싸고돈다고 했고, 우리가 다툴 때마다 아이는 불안해했다. 그래서 나는 내심 우리가 아이를 반듯하게 다듬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그치는 아빠와, 자주 우는 엄마, 두 사람의 다툼. 이런 상황들이 쌓이고 쌓여 아이의 내면은 엉망진창일 거라고 생각했다.




# 아이가 가진 힘


   그런데 재작년, MMPI검사(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와 TCI 기질검사 결과 아이는 매우 안정된 정서를 보였다.


역시나 검사 결과도 눈치 없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건강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특히 확고한 자기존중감! 남편 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라고 했다.


"나는 너랑 애옹이 둘 다 이상할 줄 알았거든."

(나도 아이와 함께 검사를 받았다. 불쾌하네?)


그러다 나는 얼마 전에 '회복탄력성'이란 책을 발견하고 제목에 끌려 읽어보게 됐다. 남편과 나는 따돌림 같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안 좋은 일도 금방 툭툭 털어버리는 아이에게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 같다'라고 하면서 그 단어를 종종 사용했었다. 책의 내용에서 애옹이의 마음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자인 김주환 교수는 국내에 '회복탄력성'이란 말을 처음으로 도입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뜻한다. 저자는 용서, 수용, (자기와 타인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되는) 존중과 같은 긍정적 소통이 회복탄력성을 높여준다고 했다. 이 긍정적 소통을 얻을 수 있는 '관계'가 핵심이었다.


1950년대의 카우아이섬(하와이 제도의 하나)은 그곳에 태어난 것 자체가 재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한 곳이었다. 에미 워너 교수는 그중에도 특히 고위험군에 해당되는 가정에서 태어난 200명 남짓의 아이들을 30년 이상 추적관찰하였는데, 그중 3분의 1에 해당되는 72명의 아이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이 부모의 삶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관계'였다. 그 아이들에게는 성장과정에서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 아이가 좋은 어른으로 잘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사랑과 그에 기반한 믿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 아이의 정서가 건강한 것은 남편 눈에는 맹목적으로 보였던 아이에 대한 나의 믿음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편은 나의 생각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항상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를 길들인 건 자기의 공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에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물론 그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이의 위기마다 남편의 적절한 개입으로 상황을 해결한 적도 많았으니까.


우리의 양육도 아이의 성장도 진행형이므로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다 자란 후에도 어떤 것이 정답이었는지는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이것 또한 그저 아이가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다. 여하 부부가 동일한 양육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아이를 키우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우리 집은 이렇게 각자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집도 있는 거지 뭐. 그래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와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도 다 느끼기에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 것 같다. 다행히.


아들이 지필고사를 말아먹은 오늘도 남편과 나는 각자의 스탠스를 취하며 팽팽하게 대치한다. 남편은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며, "마냥 감싸는 게 아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나에게  말한다. (어쩌면 나는 이 말을 호호할머니가 될 때까지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밤 10시까지 야자하고 돌아와서 새벽 1, 2시까지 공부하는 아이가 (학습의 질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학교 때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하고 온 애들이 수두룩 빽빽한데, 그러지 않은 우리 애는 어찌 보면 내신 잘 받기 어려운 게 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아이의 노력을 결과에 따라 '무(無)'로 돌리는  세상 잣대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부랴부랴 남편과 아이와 의논해 수학학원을 알아봐서 등록하고, 아빠에게 한바탕 싫은 소리를 들었을 아이에게는 확인도 잘 안 하는 걸 알면서도 톡을 보낸다. (아들의 톡에는 늘 몇백 개의 숫자가 떠 있다. 왜 안 볼까...?)


"애옹아, 그래도 엄마는 너 믿어. 더 잘해보자~"


그냥 '믿는 엄마' 콘셉트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는 진심으로 아이를 믿는다. 지금까지 단계단계 쉽지 않았지만 결국엔 딛고 일어나는 힘이 아이에겐 있었으니까. 대화창에 떠 있는 숫자 '1'은 한 달 뒤쯤에나 없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밤마다 나에게 와서 "효지(나의 애칭)~ 나조나조, 아나조(안아줘)~" 하며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진즉부터 내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신성적 잘 안 나와도 우린 충분히 행복하다. 수능 잘 보면 되지 뭐~



 






이전 04화 웰컴투 '시월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