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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Jun 27. 2024

장난감이 많은 집

너는 나의 봄



   아들은 매화꽃이 피는 3월에 태어났다. 

 무렵, 다니던 교회에서 줄줄이 아들 넷이 태어났는데, 나만 20대였고 다른 엄마들은 모두 30대 중후반의 언니들로 나와는 열 살 정도 나이차가 났다. 어느 날 그중 나에게 살갑게 대해주던 한 언니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갔다.
당시에 꽤 유명했던 아파트 광고 카피가 이랬다.

 "○○이네 집은 래○안입니다."
 "○○씨는 래○안에 삽니다."


집의 브랜드네임이 곧 그 사람의 품격임을 호소하는 내용의 광고는 지금 돌이켜보면 다소 편협해 보이지만 광고란 원래 그런 것이고, 굴지의 대기업이 지은 좋은 아파트인 건 사실이니까.

놀러 간 집이 마침  아파트였다.

전세라고 들었지만 젊은 부의 취향껏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난감이 아주 많았다. '장난감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거였나?' 하고 깜짝 놀랐다. 비슷한 시기의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끼리 대화도 잘 통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날 밤에 아이를 재우고 났는데 갑자기 마음이 서글펐다. 눈물은 안 났으면 좋겠는데, 서글픔은 사그라들지 않고 기어코 눈물, 콧물로 훌쩍이게 만든다. 그 집에 있던 장난감들이 생각나서였다.  그렇게 다양한 놀잇감을 사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나에게 그 장난감들은 '준비된 부모, 안온한 가정'의 상징 같았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스물여섯 엄마는 갑자기 현실을 깨닫고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당시 동갑내기 우리 부부는 준비 없이 부모가 됐다. 남편은 어두컴컴한 독서실에서 과자를 녹여먹으며 (밥 먹을 시간 아껴서 공부하느라 그런 건 아니고 과자를 너무 좋아해서다.) 공시 준비 중이었고, 나는 직업을 가져본 적도 가질 생각도 없었다. 그저 남편이 시험에 얼른 합격하기만을 바랐다. 양육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친정엄마가 대주었다. 지원받을 수 있는 엄마가 있는 건 그거대로 고마운 일이었고, 나의 복이었다.


그렇지만 꾸준한 수입이 없으니 지출이 있을 때마다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그 마음을 비유하자면, 매서운 강추위는 아니지만 찬기가 음습하게 스며들어 으슬으슬하게 추운 겨울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집에 다녀와서는 '괜찮다. 다 잘 될 거다.'하고 애써 스스로 다독이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주제파악이 되는 순간은 언제나 참 쓰다. 현실을 깨닫고 가난해진 마음이 지금도 어딘가엔 흔적이 남아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아이를 보면 사랑스럽고 행복하니, 이는 어떤 환경에서도 나에겐 봄이었나 보다. 

이 소중한 '봄'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마음에 덮인 우울감을 걷어내고 26년 지기 내 친구 '낭만이'를 다시 불러냈다. 언니가 경상도 억양으로 내게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나이면 겁날 게 없겠다!!"

 '그래, 나는  많이 젊.' 


그래서 잠이 좀 부족해 매일 몇 시간씩 거뜬히 애옹이(아들의 애칭)와 유모차 나들이를 하며, 온갖 것들을 구경시켜 줄 수 있는 체력이 있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물 좋아하는 애옹이가 우비 입고 나가 마음껏 '찰방찰방' 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린아이의 감수성도 있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매일 같이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러나 애옹이는 물욕이 많은 아이였다. 자라면서 방이 꽉 차게 될 만큼 장난감 '풀소유'를 누렸다.







   그러나 아이는 언제까지나 재미난 놀이가 필요한 시기에만 머물러있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때에 맞는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의 꿈은 평생 일하지 않고 사는 거였는데. 그래서 살면서 노력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나에게 이는 인생 최초의 동기부여다.


배웠던 경험을 살려 꽃가게를 해볼까? 네일을 배워볼까? 나는 손재주가 좋으니 그걸 살려보고 싶었지만 사업겁이 났다. 자본이야 어떻게든 마련한다 쳐도 나란 사람이 사업수완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메타인지는 좀 됐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취업 하자니 이 대책 없는 여자의 스펙은 어딘가에 원서 내밀 형편도 못 되었다. 플로리스트 공부한답시고 대학교를 휴학한 채 졸업도 하지 않았고, 자격증 또한 전무했기 때문이. 취업시장에서 난 '미검증 인력'이었.






   그래서 결국 아가 만 3살이 된 즈음에 경쟁률이 정점을 찍은 시기였지만 교재와 인강만으로 준비가 가능한 공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매일 민낯에 추리닝만 입고 육아와 공부를 병행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시댁에서 아이가 시누이의 화려한 구두를 내 발 앞에 놓아주었다. 어린 눈에 반짝이는 고모의 구두가 예뻐 보였는지 나보고 그걸 신으란다. 세상에~ 엄마 생각해 준 거야?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들아, 고모 신발은 엄마 발에는 항공모함이란다. 그리고 엄만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구두는 좀~.


철딱서니의 뒤늦은 노력이 하늘도 가상했는지 행운도 따라주어 1년이 채 안 걸려 합격을 했다. 독서실에서 과자 녹여먹던 젊은이도 나보다 2년 먼저 합격했으므로 우린 부부공무원이 된 것이다.


공상과 망상을 즐기며 자기도 모르게 혼자 히죽히죽 웃다가 옆 사람이 왜 웃냐고 물으면

"나 웃었어?" 하는 내가 공무원이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이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우린 모르는 것 같다.  






   꼬마 애옹이의 바람대로 드디어 예쁜 구두를 신고 출근할 직장을 얻었지만 일은 나와 맞지 않고, 사람도 힘들어 '의원면직(사직)'을 마음에 품고 다녔다. 그러다 5년 차부터 조금씩 적응을 해나갔다.




매월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보면, '내가 그 노력을 학창 시절에 했더라면.'하고 후회가 되지만 나는 결국 시간을 돌려도 애옹이가 없었다면 그냥 허랑방탕하게 살았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직업을 '나의 첫 모티브' 아들이 준 선물로 여기고, 지금은 만족하면서 즐겁게 다니고 있다.


대신 정년퇴직 아닌 명예퇴직을 꿈꾸면서 말이다.


우리 인생의 상당 부분은 견디는 시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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