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개의 이름이 있다. 아빠가 지어준 공식적인이름과 아들이 불러준 이름. 결혼 초에 남편은 나를이름으로 부르곤 했는데, 아이가 말이 트이면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효지야~~~"하고. 아고, 귀여워.
아빠가 여러 날 고민해서 지었다지만 많이 흔한 진짜 내 이름보다 나는 아들이 불러준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그래서 닉네임이 필요한 곳에서 대부분 '효지야'를 사용한다. 이렇게 나를 명명해 준 두 사람, 나의 아빠와 아들은 '소울메이트'다.
아이가 네 살 때 시작한 직장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지금에 비해 육아 관련 제도도, 돌봄도 활성화되지 않아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한국땅에 있는 나의 유일한 혈육인 친정아빠가 서울에서 P시까지 와서 아이를 돌봐준 날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친정아빠가 아이를 챙겨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 어느 집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보면서 꼬마 애옹이(아들의 애칭)가 말했다.
"할아버지, 저 사과 하나만 따 볼까?"
"안돼. 주인이 알면 야단맞어."
할아버지는 거절했지만 아이는 할아버지를 한 번 더 꼬드겼다.
"야단은 내가 맞을게~ 할아버지~ 하나 따 봐."
이런 맹랑한 꼬마를 보았나. 끝내 사과를 따지는 않았지만 친정아빠는 어쩌면 지금도 사과를 보면 이때 생각이 날지도 모르겠다. "쬐끄만 머릿속에서 어떻게 고런 생각을 하냐? 야단은 지가 맞겠대. 허허허."라면서나에게 그 에피소드를 수차례말한 걸로 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말수가 적은 딸과는 달리 재잘재잘 수다스러운 손자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아이에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의 크기는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한다.
나의 아빠는 일생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직업을 가질 생각을 안 해본 데에는 아빠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처럼 들어보면 끄덕일 만한 사연도 아빠에게는 있었지만 그 사연을 무기 삼은냥한평생을 노력 없이 살면서 마작, 경마 같은 것들로 인생을 허비했다.
엄마도 다를 바 없이 놀음방을 전전했지만 커가는 나를 보며 늦게나마 위기감을 느낀 쪽은 엄마였다. 엄마는 일본에서먼저 터를 잡고 지낸다는 지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가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고, 당시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을 때였다.
외향적이고 장사 수완도 좋은 엄마는 한국음식을 파는 이자까야를 차려 밤잠 못 자가며 일했다. 열심히 번 돈으로 서울에 아빠 명의의 아담한 집도 마련해 주고, 생활비도 부쳐줬지만 엄마의 노력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보내준 돈들은 써서 없앴다 치더라도집은압류까지 걸려 있었으니 한결같은 우리아빠의 작품이었다.
구제불능. 나는 아빠를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 길로 갈라섰고,나는 꽤 오랫동안 아빠를 미워했고, 그 미움은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더 깊어졌다.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고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는지. 세상엔 더러 그런 부모들이 있다는건 좀 더 나중에야 알았다.모두 처음 사는 인생이니까.
그런데 내 아들이 커가면서 나의 아빠를 좋아했다. 내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나는 어려서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주기적으로 매를 들어서 나를 불안하게 했던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집 아빠들처럼 저녁마다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는 또 나에게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외출하면 따라 나가서 뒷모습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곤 했다.
사춘기 무렵 나는 아빠와 둘이 살면서 아빠가 트로트보다는 포크송이나 올드팝송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낭만적인 아저씨는 한동안본인 취향껏 우리 집에 꽃화분을 열심히 사다 날랐지만 그때는 내가 키우는 재미를 모를 때라 얼마 못 가서 다 죽(이)고 말았다. 초여름에 달큰한 향을 풍기던 치자꽃나무가 죽어버린 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몇 송이만 피어도 거실 전체가 그윽하던 지차꽃 향기
이렇듯 잔잔하게 물 흐르듯 편안한 성격의 아빠는 예민하고 엄격한 성격의 남편과는 정반대이기에, 내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애옹이에게도 숨구멍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이 키우는 집이라면 이거 안 해본 집 없을 것 같다. "누가 제일 좋아?"로 시작되는 인기투표.애옹이에게 언제나 부동의 1등은 '엄마(나)', 2등은 '외할아버지(친정아빠)'였다. 근데 어느 날는 2등으로아빠(남편)를 꼽아서 평소 친정아빠와 애옹이의 사이를 질투하던 남편은 '드디어 장인어른을 이겼다'라고 쾌재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뭘 서운하게 했나 싶어 물어보았다.
"그럼 할아버지는?"
"1.5등".소수점을 배운 애옹이는 답하면서 아빠를 보고 씩 웃었다.
아이가 조금 커서 나와 떨어질 수 있게 되자두 사람은 전철여행을 다녔다.철도덕후 애옹이의 니즈를 맞춰주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는데, 일생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인지 체력이 젊은 나보다 좋았다. 서울은 물론 여주, 춘천까지.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도권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렇게 다니는 중에 누가 "손자가 할아버지 닮았서 이쁘네요." 하면 기분 좋아서 나에게 자랑하던 아빠는 희로애락의 진폭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럴 때만큼은 무방비로 웃으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빠의 손주사랑은 끝날 줄을 몰라서 애옹이가 중학생 때까지 하교할 시간이면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일하는 엄마 대신 간식도 챙겨 먹이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둘만의 잔잔하고 행복한 시간을 엮어나갔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가 난 이후로 뚜벅이로 살아 지하철을 잘 알았고, 역사지식도 해박했던 아빠는 철도와 역사 덕후인 애옹이에게는 최고의 대화상대였다. (남편은 아이가 너무 말이 많아 시끄럽다고 '10분 동안 말하지 않기' 같은 지령을 내리니 챙겨줄 거 다 챙기고도 만년 3등인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렇다 쳐도 할아버지가 중학생이 된 아이의 학교 앞까지 가는 것이 나는 내심 걱정스러웠다.어릴 적 나는 아빠가 애틋하게 좋으면서도 남들 앞에서는아빠가 부끄러웠던 기억 때문이다. 엄마보다 열네 살이나 많고, 직업도없는 아빠가 남들 눈에 초라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애옹이에게 살며시 물어보았다.
"근데, 할아버지가 학교 앞에 가면 안 창피해?"
"왜 창피해? 효지는 할아버지가 창피했어? 어머~~~"
예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잠시의 고민도 없이 나온 아이의 반문에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아빠를 사랑하면서도아빠의 초라함이부끄러웠던 '어린 효지야'는아이를 통해 위로받았고,무책임한 아빠를 원망한 '어른 효지야'는 아이의 모습에서 자기의어린 시절을 보며마음으로 아빠와 화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오롯이 노인의 모습이 된 아빠의 존재만으로도감사할 수 있게 됐다. 이아이는 나의 결핍들을 치유하려고 태어났나 보다.
"할아버지가 왜 좋아?" "그냥." 그래, 좋은 덴 이유가 없지.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두 사람은 전처럼 자주 함께 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전화로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시험이 끝나거나 방학을 하면 아이가 친정아빠집으로 가서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다. 조손의2박 3일 정도의 여정은 발길 닿는 대로 이어진다. 오늘 두 사람은 춘천에 가서 닭갈비도 먹고 소양강댐도 보고 시청 근처로 가서 '잼배옥'이란 식당에서 설렁탕을 먹고 이제 사우나에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내일은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자고 했다는데, 내일모레 여든인 우리 아빠 고생하시네.
우리 애는 통일을 꿈꾸는요즘 보기 드문 아이인데, 중학생 때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할아버지 고향 알지?"
"응, 황해도 개성 사리원."
"틀렸어. 개성과 사리원은 별개의 시(市)야. 그냥 황해도 사리원이야. 통일되면 할아버지랑 한 번 가보면 좋겠다. '옥류관' 가서 평양냉면도 먹고. 엄마,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디에 묻어 드려?"
"묻을 데가 어딨어. 화장해 드려야지."
"아... 화장은 싫어, 너무 끔찍해. 사리원에 좋은 땅 사서 묻어드릴 거야 내가."
다섯 살에 떠나온 고향이 아빠에게 의미가 있을는지도 모르겠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조금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할 것 같지만 한때나마 이렇게까지 생각해 준 손자가 있어서 우리 아빠는 참 행복하겠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