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ojiya Jul 22. 2024

이런 두통은 처음이야

'갓생'로드에 켜진 빨간불


 

   예고하고 찾아오는 병은 별로 없겠지만 그럼에도 느닷없었다. 남편은 타고난 체질은 허약했지만 몇 년 동안 꾸준하고 독하게 운동한 덕에 어느 때보다 건강했고, 건강검진도 꼬박꼬박 잘 챙겼다. 


발병 당시 광화문에 있는 제법 큰 기관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사회초년생 시절엔 조직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퇴직과 이직을 반복했었다. 현 조직에서도 처음에는 한직만 찾아다니며 배회했지만 시나브로 자신감이 붙어 나름 선망받는 기관에 가보고 싶어 했고, 입성에 성공했던 것이. 


종로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지금은 생활반경이 P시인 내게 사대문 안에서 근무한다고 뻐길 때는 살짝 가소로웠지회사 근처 맛집을 알게 되면 나와 아들을 꼭 챙겨서 데려가주는 다정한 구석이 있었. 빌빌대더니 이제는 자기 인정받는다고 잘난 체도 할 만큼 어엿해진 모습이 아내로서 보기 좋았다. 내가 키운 시어머니 아들, 대견하군.


 "나는 너 출세시키고 살림하는 게 꿈이야~" 라더니. 


그러고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심리상담사를 해보겠다며 대학원엘 갔다. 주말에도 강의 들으랴, 과제하랴, 원우모임 하랴 바빠 보였다. 내가 아는 남편은 혼자 있으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타입인데, 모임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어릴 적 동네친구들부터 대학동기, 이모뻘인 회사 아줌마들(남편 찌질이 시절 챙겨준 선배님들) 모임까지 족히 대여섯 개는 됐을 거다. 


그뿐인가? 노조 지부장에, 좋아서 한 건 아니지만  년 전 급성폐렴으로 갑작스레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숙제처럼 남긴 일들 갈무리에, 의료분쟁까지. 온전하게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열 개까지는 몰라도 한 개 몸은 분명히 부족해 보였던 남편은 내 기준엔 그야말로 '갓생'을 살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란 어린 나이에 아빠가 돼서 맘껏 즐기지 못한 청춘에 대한 보상심리였는지,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해져서 활력이 넘쳤던 건지, 자아실현을 하려던 건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많은 것들을 했는지 나는 잘은 모르겠다. 좌우지간 20년 가까이 함께 살며 본 중에 가장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호시절을 보내던 남편에게 얄궂게도 훼방꾼이 찾아온 것이다. 2023년 6월 11일에. 






   남편이 일직(낮당직) 당번인 날이었다. 기름진 음식을 좋아해 점심으로 볶음밥을 먹고 나서 노곤해진 남편은 당직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걸치고 잠이 들었댔다. 팔걸이가 높아서 목이 거의 90도 정도로 꺾인 자세로 잔 것이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나고 눈을 떠 몸을 일으키니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평소에도 둘 다 신경이 예민한 탓에 조금만 리듬이 깨져도 머리가 아프곤 해 처음엔 먹자마자 잠이 든 바람에 소화가 안 돼서 생긴 두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평소의 두통과는 양상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일단 진통제가 전혀 듣지 않았고, 서 있으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데, 몸을 누이면 통증이 말끔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남편은 '기립성 두통'으로 검색해서 정보들을 수집한 다음 '자발성 두개내 저압증'으로 자가진단을 내렸다. 


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뇌척수액이 새면 동동 떠있어야 하는 뇌가 아래쪽으로 쳐지게 되면서 여러 가지 신경증상을 유발한다. (퍼다 쓸 이미지가 없어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






  '아이고, 유난스럽다~ 의사 나셨네.' 싶은 한편, 머릿속에서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논리를 펼쳤다. 우리 남편은 몸에 이상 징후가 생기면 바로 병원부터 가는 사람이다. 낫겠거니 하고 병을 한껏 키운 다음에 병원 가서  "많이 아프셨을 텐데 어떻게 참았어요?"라는 말을 듣는 나와는 완전히 반대다. 발병 일주일 전, 남편이 배에 조그맣게 올라온 붉은 반점을 보고 '대상포진' 같다면서 보여주기에 나는 단순 피부염 같으니 연고나 바르라고 했다. 긴가민가 하던 남편은 단순히 붉은 게 아니라 수포가 보인다면서 기어코 일요일에 문 여는 병원을 찾아서 갔다.  피곤하게 산다생각했지만 남편의 진단은 정확했다. 


그렇다. 신속함은 물론이거니와 남편에겐 그렇게 정확하고 치밀하고 집요한 구석이 있다. (나로서는 가끔 숨이 막히는 면이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부디 그런 남편의 판단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결론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끔찍한 두통과 함께 남편의 '갓생'은 일순에 허물어졌다.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린 것이다. 스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