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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Aug 10. 2024

완치... 라구요?

멈춘 일상에 갇힘

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연애기간까지 따지면 우리 인생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그러지 않은 시간보다 다. 남편은 나로 하여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랑꾼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 않았나 싶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타고난 성품이 '왕자병+개복치'에 가까워서 (종종 이렇게 부를 예정이다.) 사실 혼자 사는 게 더 맞았을 성격이다.      


동갑내기 우리 부부는 싸우기도 엄청 싸웠는데, 갖가지 주제로 더 이상 싸울 게 없을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럴 때면 항상 나의 포지션은 울보였다. 둘째가라면 서럽게 눈물 많은 나는 올림픽 때 애국가만 울려 퍼져도 안구가 촉촉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대단한 애국자는 아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나를 보면 남편은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더 화를 내곤 했다. 그런데 병에 걸린 왕자병 개복치가 나보다 더한 울보가 됐다. 기회다.


 "너는 예전에 내가 울면 막 화냈잖아. 사과해."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촉촉한 눈으로 두 손을 맞대고 빌면서 사과하다가 어이가 없어진 남편은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치졸한 나의 사과 청구는 그냥 한 번 웃겨주려고 그런 것이다. 그래도 왕자병 개복치 주제에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돌도 안 된 애옹이(아들의 애칭)를 데리고 시댁에 들어가서 지낼 때, 시어머니와 시누이 몰래 “이거 네가 입으면 예쁠 것 같아서 샀어.” 하면서 수험서가 든 가방 안에 숨겨온 쇼핑백을 주섬주섬 꺼내던 풋풋했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 그리고 울보가 한 사람 더 있다. 간경화 때문에 28년 만에 일본 생활을 접고 돌아와 우리 집에서 지내던 친정엄마. 엄마는 병이 난 자기 신세가 처량해서 울고, 고라니 같은 다리를 하고서 회사도 못 가고 멍하니 앉아있는 젊은 사위 모습에 또 울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어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도 울었다. 우리 집은 눈물바다다.      


    




   "들으셨죠? 완치예요." 작년 11월, 발병 5개월 차, 대학병원에서 받은 두 번째 시술 후에 남편은 완치 판정을 받았었다. 추적검사로 실시한 '울트라패스트 CT'라는 정밀검사에서 새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결과를 듣고 우리는 그립던 일상을 드디어 되찾았다는 기쁨에 손을 맞잡았다. 드디어 이 무섭고도 지겨운 병원에서 해방이었다.


우리 세 식구(남편, 나, 아들)는 모두 수술을 한 번씩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이렇게 길게 병원을 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은 서울 4대 병원 중 하나인 만큼 중증 환자가 많다 보니 가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오열하는 사람을 보게 거나 어린이 병동을 지나갈 때는 특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욕심이 사라지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군가도 복도에 서서 눈물을 떨구는 우리 남편을 보며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이 사람들은 아파야만 할까? 왜 하필 내 남편에게 이런 병이 생겼을까? 삶은 역시 공평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자연의 섭리는 공의로운지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병원 안까지 곱게 물들여 주었다. 완치 판정까지 받았으니 우리에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늦가을이었다. 주말이라서 외래환자가 없어 한갓진 병원 안에서 우리는 온갖 빛깔 속에 오도카니 서 있는 시계탑 건물의 둘레를 거닐면서 그간의 과정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되는 병원 풍경이 고즈넉하고 예쁘게 느껴지니 이 마음 또한 누군가의 고통은 외면한 가벼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딱 하루짜리였다. 남편에겐 두통과 여러 신경 증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시간이 흘러도 완치 판정이 무색한 몸 상태에 답답한 노릇이었다. 담당 교수님은 남편의 의구심에 대해 뇌척수액이 새면서 정밀검사에 안 나온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후유증으로 만성 편두통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해서 몇 개월 동안 편두통 치료도 해보았고,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블러드 패치도 두 번 더 받아 보았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남편에게 담당 교수님은 말했다.     


 "이제 저도 모르겠어요. 독일 가신다면서요. 수술하셔야죠, 뭐. 수술비가 얼마라구요?"     


사실상 포기 선언과 다름없었다. 교수님 입장에선 어차피 동원의 신경외과는 협조도 안 되고, 신경과에서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다가, 징징거리는 환자에 대한 짜증이 몇 프로는 섞여 툭 나와버린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남편은 벼랑 끝에 밀쳐진 기분을 느낀 듯했다.      


 "의사도 나를 포기하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돼?"     


처방받은 편두통 치료제와 정신과 약을 한 보따리 들고 나오던 길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남편은 이내 남들이 보건 말건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을 닦아주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독일에서 '뇌척수액 누출' 환자들의 삶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증 류머티즘이나 말기 암 환자 이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지고, 그에 따른 정신적 고통 또한 극심하다고 한다. 실제로 환우 중에는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는 것을 보면 남편의 스위스 타령도 순 엄살은 아닌 것이다. 그런 고통 속에 있는 남편에게 나의 위로는 공허하게 맴돌 뿐이었다.


 "후유증이 오래가기도 한다잖아. 좋아질 거야. 나아질 거야.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견뎌보자. 응? 아님 독일 가면 되지 뭐."  


 "울패(정밀검사)에서 새는 데가 보여야 독일 가서 수술을 하든가 하지."


그렇다. 등 전체를 열고 척추뼈를 다 뒤집어 어디가 새나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울트라패스트 CT'(정밀검사)에서 타깃점이 나와야 독일에 가도 수술이 가능했다.


왜 새는 곳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럼 정말 막힌 건가? 그럼 남은 통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각의 순환은 결론을 짓지 못한 채, 완치 판정과 남은 증상 사이에서 우리는 이후 몇 개월 동안 완전히 오리무중의 상황이 되어 일상을 되찾기는커녕 멈춰버린 일상 속에 기약 없이 갇혀버렸다.      





   

공시생 남편이 사다 준 옷을 보풀이 나도록 잘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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