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남편은 회사 선배가 알려준 한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선배는 아주 심한 두통이 그곳에서 한 번 만에 말끔히 나았다고 하니 우리는 신기루 같은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완치 판정으로 원인 불명이 된 지긋지긋한 두통을 겪고 있자니 구석에 밀쳐뒀던 신기루가 남편에게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하여 남편은 P시에서 강남까지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물론 '속는 셈 치고'라는 가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에너지 치료'를 한다고 하니 그곳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한의원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감지가 됐고, 이른바 '대체의학'이란 것에 해당되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은 아니다. 신앙이 있고, 기질검사 결과 영성이 매우 높은 편이고, 타인의 감정 에너지를 상당히 잘 느낀다.
그럼에도 한의사 선생님이 남편에게 병의 원인으로 언급하는 것들은 선뜻 수긍이 되지 않았다. 전생, 조상, 죄와 같은 단어들.
'그건 길거리에서 영이 맑다면서 말 거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인데...'
그러한 생각이 무색하게 남편은 그곳에 다니면서 두통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게 이보다 반가운 말은 없었다. 완치 판정도 받았으니 두통만 사라지면 만사형통 아닌가? 꺼림칙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이 넓은 세상에 그런 비범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나도 한 번만에 편두통이 싹 나아서 진통제와 이별하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 같이 가서 치료를 한 번 받아볼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보류에서 타협으로 노선을 갈아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심이 퍽 많은 나는 여전히 100%의 신뢰는 아닌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서 한 번 가보았다. 한의원에 들어가자마자 남편은 홀린 듯이 어딘가로 향했다. 의문 가득한 나의 시선이 남편을 좇고 있자니, 금세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온 남편의 손은 무언가를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할 틈도 없이 내 입속에 넣어주니 얼결에 받아먹었다.
“으음~”
“맛있지?”
땅콩 캬라멜이었다. 꼬수움에 눈이 번쩍 뜨인 나를 보면서 남편은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군것질에 환장하는 불혹의 아저씨다. 캬라멜을 입에서 오물거리는 동안 남편은 들어가서 에너지 치료를 받고 나왔다. 어떤 식으로 치료를 하나 궁금했지만 들여다볼 넉살 같은 건 내게는 없는 거라서 귀만 쫑긋 세웠다.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었다. 10분에서 15분 정도의 진료가 끝나고 나오면서 남편은 또다시 땅콩 캬라멜을 두 개 집어 와서 나랑 하나씩 나눠 먹었다.
내가 그동안 뉴스 등을 통해 학습한 사기꾼들은 동기가 주로 물욕 아니면 성욕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비싼 약이나 의료기기를 팔지 않는 것을 보면 일단 돈으로 사기 치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경계지수를 살짝 낮추고 다음번 방문 때는 나도 같이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예약을 잡았다.
내 기준 두 번째 방문. 남편은 지난번과 똑같이 한의원에 들어가자마자 코스처럼 땅콩 캬라멜을 집으러 갔다.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주문을 좀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포장비닐에 적힌 상호명을 봤다.
앞의 환자가 치료를 받는 동안 우리는 대기실에서 캬라멜을 먹으면서 기다리는데, 옆에는 앞 환자의 보호자와 반려견이 함께 있었다. 강아지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병원인데 반려견 출입도 가능하고 프리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귀엽다. 다솜이(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집 강아지)랑 성격이 비슷한가 봐."
내 말을 들은 강아지의 반려인이 말했다.
"다솜이요? 강아지 이름이 되게 사람 같네요."
다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할 정도로 되게 사람이름 같은가 싶어서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런가요?"
"제 이름이 다솜이거든요."
재밌는 우연이면서도 괜히 미안해졌다. 예전에 동물 프로그램에서 악어에게 '선미'라고 이름 지어준 아주머니를 보고 엄청 웃었는데, 나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혹시 다음에 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운다면 사람이름과 겹치지 않을 만한 것으로 짓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생각을 하면서 여운을 느끼는 사이 남편이 치료를 받고 내 차례가 되었다.
두통 징후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들로 진료를 시작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중 의미 있는 질문은 이 정도?
“부모님이 혹시 두통이 있으셨어요?”
“네, 엄마는 두통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셨어요.”
아빠도 머리 아프단 소리를 자주 했던 걸로 기억하지만 왠지 몰라도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환자용 침대에 누워 에너지 치료라는 것을 받았다. 치료과정은 그분의 영업상(?) 비밀일 수도 있으니 설명은 생략하지만 신체적 접촉이나 불쾌감을 주는 요소는 없었다. 다만 조금 기이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변태 사기꾼도 아닌가 보다.
그런데...?
"두통이 엄마로부터 와요. 관계라는 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건데, 엄마가 좀 이렇게 많이 가라앉아 있어요. 엄마에게 너무 마음을 쓰지 마세요."
우리 엄마 보셨어요? 용하게도 엄마랑 나는 찰떡같이 맞지는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모녀지간이 그렇지 않나? 아니, 근데 나는 치료를 받으러 온 건데 왜 점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나는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이후로 두통이 없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아프면 그냥 약 먹고 말지 싶었다. 그렇지만 간절한 남편은 아픈 몸으로 강남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땅콩 캬라멜 맛집에.
20회 정도 갔을 무렵 한의사 선생님은 남편에게 중대발표를 예고했다. 이제 치료가 거의 다 됐고, 병의 원인을 알았으니 다음번에 오면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엔딩곡이 울린 드라마의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며칠 후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한의원에 다녀온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인이 너래."
그토록 궁금해하던 원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한 말이 아닌데도 쓰자니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민망함을 이해받고 싶다.)
우리 엄마 쪽 집안에 잘못(죄)이 많음.
이것이 나를 통해 남편에게 균열의 에너지를 보내서 경막이 찢어짐.
그러니 나를 화나게 만들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내가 진료받던 날 나의 에너지를 차단해 놓기는 했지만 되도록 같이 와서 치료받으면 좋을 것.
얘기가 이렇게 흘러가다니. 근데 나는 솔직히 좀 혹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대단한 능력자가 아닌가? 나를 속상하게 만든 사람들, 다들 조심하시길. 나의 균열의 에너지가 당신을 아프게 만들 수 있으니.
아... 균열의 에너지를 쏘는 초능력자가 돼서 남편을 조종할 것인가? 이제 그곳은 그만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할 것인가? 내적갈등이 치열했던 하루였다. 남편과의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긴 한데...
그래도 사람이 천성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다.
"설마 그거 믿어? 거기 이제 그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남편은 지푸라기를 놓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도 몇 번을 더 다녀오고 나서야 발길을 끊었는데, 마음은 더 가고 싶은데 내 눈치를 보느라 못 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이해한다. 얼마나 간절하게 낫고 싶었을까? 안쓰럽다. 그냥 계속 다니면서 플라세보 효과라도 체험하게 놔둘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사실 나도 당시에 그런 말을 듣고도 그 한의사의 말이 헛소리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웠다. 100%의 신뢰가 없었듯 100%의 불신 또한 쉽지가 않았다. 남편이 나아지고 있다고 했던 말 때문에 나 역시 지푸라기를 못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회사 후배에게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자책도 했었다.
"아니, 당직실에서 안 좋은 자세로 주무셔서 그렇게 되신 거잖아요?!"
맞다. 그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중심을 잃어버린 마음은 쉽게 미혹 돼버리고 마는가 보다.
(어쩌면 당연히) 남편은 근본적인 치료가 된 것도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난 시점(지난 7월)에 여전히 척수액이 새고 있음과 더불어 다른 증상까지 추가적으로 생겼음이 확인됐으니 말이다.
이 돌팔이!!! 야금야금 사기꾼
여담으로 우리는 인터넷으로 그 땅콩 캬라멜을 주문해서 먹고 싶은 대로 양껏 먹었더니 속이 니글거렸고, 결국엔 물렸다. 그곳에 다니는 동안 남편이 호전되는 것처럼 느낀 것은 아무래도 한두 개씩 집어먹던 고소하고 감질난 땅콩 캬라멜 때문에 엔도르핀이 돌았던 건 아닌가 싶다.
따져보니 남편은 개당 몇만 원꼴인 세상에서 가장 고급진 땅콩 캬라멜을 먹은 셈이었다. 약을 안 팔아서 사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약을 파는 게 나을 뻔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그 자체로 이미 합리성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일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사람은 아마도 그런 마음을 돈벌이에 이용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삐뚤어진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닐까? 뭐가 됐든 우리는 누구에게 추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푸라기를 움켜쥐는 사람들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
그래도 '속는 셈 친다'는 안전장치 덕분에 타격감이 크지 않아서 이만하면 싼 값에 인생교훈 배웠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또 만날지도 모르는 제2의, 제3의 땅콩 캬라멜 맛집은 잘 걸러보자 다짐도 해보며.
* 캬라멜은 캐러멜의 잘못된 표기입니다. 근데 땅콩 캐러멜은 뭔가 오글오글해서요...